▲정재우 대표(가족행복학교, 평택교회 원로목사)ⓒ데일리굿뉴스
 ▲정재우 대표(가족행복학교, 평택교회 원로목사)ⓒ데일리굿뉴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라면의 장면이 하나쯤은 있다. 나에게도 있다. 처음엔 우동이 좋았다. 분식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동 한 그릇을 받아 들고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맛이 있구나’ 감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라면을 만났다. 우동보다 더 싸고, 더 직설적이고, 어딘가 더 솔직한 맛. 그날 이후 나는 우동에서 라면으로 갈아탔다. 인생의 첫 사소한 취향 변화였다.

스위스 융프라우 알프스 정상에서도 라면은 나를 반겼다. 해발 3,454m의 칼바람을 맞으며 컵라면 뚜껑을 열던 그 순간, 세계 최고봉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건 결국 뜨거운 국물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배웠다. 지금도 그 짧은 휴식이 여행의 모든 풍경보다 더 선명하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삼각산 기도원에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 끓이던 라면은 늘 연탄 냄새가 함께 배어 나왔지만, 그마저도 허기진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였다. 

군대의 라면도 마찬가지였다. 퍼져도 좋았다. 건빵보다만 낫다면 그건 이미 축제였다. 밤중에 몰래 끓여 먹을 때면 금지령이 주는 긴장감과 라면의 짭조름함이 어우러져 더 특별한 한 그릇이 되곤 했다.

결혼 후에도 라면은 작은 사건을 만들었다. 해외 여행 다녀온 뒤 몰래 숨겨둔 라면이 아내의 ‘정밀 수색’에 걸렸던 일. 들킨 순간의 민망함보다 라면이 압수됐다는 사실이 더 아쉬웠던 건 지금도 비밀이다. 

가족 여행 중 호주에서 먹었던 피지산 라면도 잊을 수 없다. 해외의 라면은 늘 어딘가 부족한데, 그 ‘부족한 2%’를 정확히 채워주는 것이 바로 한국 라면이다. 그때 K-푸드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았다. 라면은 이미 세계인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라면과 인생은 닮았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절,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라면 한 그릇의 온기가 늘 인생의 어느 장면과 연결된다. 새벽 두 시, 겨울바람을 맞으며 끓여 먹던 라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의 위로였다. 

빈 지갑을 털어 친구들과 나눠 먹던 그 짭조름한 국물 속에는 말없는 연대감과 서툰 응원이 담겨 있었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한마디에는 어설픈 관심, 풋풋한 우정, 시절의 온기가 함께 들어 있었다.

라면은 도전의 순간에도 늘 함께였다. 신제품 라면이 나오면 꼭 사서 시험해보던 설렘, 인생 라면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기대보다 싱거웠을 때의 실망까지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여유와 ‘다음 더 좋은 게 온다’는 희망을 배웠다. 라면은 작은 도전의 스승이었다.

또한 라면은 인생의 감초 같은 조연이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외로움이나 사랑의 시작을 채우는 장면에는 늘 라면이 등장한다. 좁은 자취방의 스탠드 불빛 아래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처럼, 우리 인생에도 때로는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눈에 띄지는 않아도 없으면 허전한 사람. 라면은 그런 존재의 은유다.

그리고 라면은 잊고 지내던 추억을 데워주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어느 날 문득 끓여 먹은 라면 한 젓가락에 어린 날의 방 냄새, 친구들의 웃음, 가난하지만 뜨겁게 버티던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라면은 그래서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인생의 조각들을 담아둔 그릇이다.

라면의 철학도 있다. 몰래 먹는 라면이 왜 더 맛있을까. 나만의 작은 행복, 그 아기자기한 기쁨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처럼 변형과 창의력의 여지도 넓다. 입맛을 잃었을 때 라면 한 그릇이 회복을 주듯, 밋밋한 삶에 양념을 더해주는 자극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라면의 맛은 ‘타이밍’이다. 면이 퍼지기 전 건져야 하고, 끓지도 않은 물에 넣으면 실패한다. 중국 호텔에서 끓지 않은 물에 라면을 부었다가 단체로 탈이 났던 경험은 인생의 교훈처럼 남아 있다. 기다릴 때는 기다리고, 잡을 때는 정확히 잡아야 한다는 것.

라면은 인류의 영원한 동반자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라면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가끔 꺼내 먹으며 추억을 데우는 한 그릇. 인생의 짠맛과 단맛을 함께 끓여낸 그 따뜻한 국물을 나는 앞으로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결국, 제때 불을 끄는 사람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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