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데일리굿뉴스
    ▲송기원ⓒ데일리굿뉴스

11월 초순 자정을 넘긴 시간, 낯선 이메일을 받았다. 평소 받아 보던 메일의 발신처와는 약간 다르게 표기돼 있었다. 스팸 메일 같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열어봤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손꼽히는 미국 유명 대학에서 온 메일이었다. “학생들이 식량 부족 사태로 허덕이고 있다. 지금”이라는 제목의 편지였다.

기초생활센터 관리자가 보낸 편지는 미국 연방 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중단)으로 11월 저소득층 식비 지원 프로그램이 중단돼 학생 5,000여 명이 필수적인 식품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학생들의 건강을 해치거나 학업 중단이 우려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관리자는 75달러면 학생 한 명의 일주일 식비를 충당하고, 300달러면 한 달 식비, 500달러면 학부모까지 식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몇몇 인사들이 이미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했다며, 많은 이들의 동참을 요청했다.

편지를 받고 나니 미국 연방 정부 셧다운 사태가 불쑥 내 주변 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그간 보도를 통해 여러 가지 파장을 접했지만 남의 일로만 여겼던 터였다. 연방 정부 공무원의 급여 지급이 중단됐고, 대량 해고 위기에 내몰렸으며, 궁핍함에 내몰려 식비 지원을 받는 대열에 줄 서 있다.

다음 날 TV 뉴스는 매달 정부 지원금 200여 달러를 받으며 두 아이를 양육해 온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그녀는 “정치가 먹거리를 매개로 사람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전락시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울먹였다. 그녀처럼 저소득층 식비 지원이 중단된 이들이 4,200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미국 내 소비자 심리지수도 얼어붙어 3년 내 최악이라고 했다. 10월 1일 시작된 셧다운이 역대 최장기간 계속됐으니, 정치권에 대한 민심의 분노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다.

상황은 건강보험인 오바마케어의 보조금 연장을 두고 여야 정치권이 대립하면서 빚어졌다. 오바마케어는 2010년 오바마 정부가 도입한 건강보험 개혁법안이다. 모든 국민의 가입을 의무화하고 저소득층 보조금을 확대해 의료 보험 사각지대를 줄이겠다는 취지로 제정됐다. 미국의 의료 보험료가 턱없이 비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소득층뿐 아니라 많은 미국민에게 필요한 제도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보험 혜택이 불법 이민자나 보험사에 돌아간다며 보조금 연장을 반대했다.

셧다운이 40일 이상 계속되면서 정치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상원의 민주당 측 중도파 의원 8명이 정부의 임시 예산안에 찬성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공화당은 그 대가로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법안에 대한 표결을 12월 중순까지 하기로 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반대했지만, 임시 예산안은 상원에서 통과됐고 하원에서도 가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셧다운은 43일 만에 끝났다. 역대 최장 기록보다 8일 더 길었다. 공무원 사회와 저소득층 등 미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 경제 시장이 일단 안도했다. 

미국 정치권의 갈등은 하지만 끝이 아니라 전면전,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대해 “민주당이 갱단, 교도소, 정신병원 출신 불법체류자에게 1조 5,000억 달러를 지급하길 원했다”며 “다가오는 중간 선거와 다른 선거에서 그들이 우리나라에 한 일을 잊지 말라”고 민주당을 겨냥했다. 민주당은 오바마케어를 방치하면 “400만 명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2,000만 명의 보험료가 인상되며, 10년 안에 1,000만 명이 추가로 무보험자가 된다”며 보조금 연장을 관철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오바마케어 보조금이 연장될지, 공화당이 또 다른 건강보험 개혁안을 추진할지 불투명하지만, 미국 정치권이 심각한 갈등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이민자 단속, 주요 도시 내 군 병력 투입을 비롯해 사사건건 양당이 대립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강경 대치 국면이 내년 중간 선거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시각도 있다. 

우리 정치 현실을 떠올린다. 내년 예산안을 설명하는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에 야당 의원들이 전원 불참했다. 국민의힘은 내란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추경호 전 원내대표에 대해 구속 영장이 청구된 데 항의해 시정 연설 듣기를 거부했다.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가려는 대통령을 향해 “꺼져라”라고 외쳤다. 야당 대표는 “이재명 대통령의 마지막 예산안 시정 연설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여당 대표는 그 발언을 “명백한 대선 불복 선언”으로 규정했다. 우리 정치권의 지금 모습은 극히 비정상적이다. 대화와 타협은 자취를 감췄고 막말, 대립, 갈등만 넘쳐난다.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을 자제할 것을 요청한다. 예산 편성과 심의 기능은 국민이 국회에 위임한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 기능을 저버리는 것은 나라의 살림, 국민의 살림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료 의원에 대한 영장 청구에 항의를 표시한다며 시정 연설 듣기를 거부하는 것은 명분 없는 일이다. 미국의 셧다운도 결국 비판 여론에 굴복해 미봉책이지만 타협점을 찾은 게 아닐까. 정치는 민심을 이기지 못한다. 효용감을 주지 못하는 정치는 외면 대상일 뿐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