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立冬) 다음 날인 11월 8일 토요일 오후 4시 직전, 서울 경복궁 입구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마지막 입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다. 백화점 오픈 런을 방불케 했다. 시간에 맞춰 입장이 허용된 관람객들은 마치 복권에 당첨된 듯 기뻐했다.
경복궁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의 명소’로 꼽힌다.
10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평소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북적거렸다. ‘코리아 그랜드 페스티벌’ 행사 일환으로 경복궁을 포함한 4대 궁과 종묘 등 명소의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맑고 따듯한 날씨 덕분에 관람객들은 청명한 가을을 즐길 수 있었다. 경복궁은 관광객들이 입은 형형색색의 한복과 붉게 물든 단풍이 어우러져 늦가을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경복궁 등 고궁의 인기는 방문객 수로 입증된다. 서울시는 최근 가을철 서울 명소에 대한 SNS 언급량, 이동통신 이용량 등(2024년 10월 기준)을 발표했다. SNS 언급량은 경복궁이 3만222건으로 가장 많았고, 창경궁·창덕궁(1만3,146건·5위)과 덕수궁(1만1,169건·7위)은 ‘TOP 10’에 포함됐다.
올해(1~9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650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약 552만명)보다 18%가량 늘었다. 이 가운데 80% 이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여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에 집중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공간적 배경이란 점도 한몫했다. 케데헌은 북촌 한옥마을과 남산 서울타워 등 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담아 내 해외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서울은 또 경복궁, 종묘 등 여러 고궁이 잘 보존돼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세계적인 도시보다 문화적 경쟁력이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경복궁과 종묘 등 문화유산을 둘러싸고 볼썽사나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의 ‘무단출입 및 사적 유용’이다. 서울시는 또 종로구 세운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고시를 통해 구역 내의 기존 55~71.9m였던 건물 높이를 최대 141.9m까지 허용키로 해 논란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맞은편에 위치한 세운4구역에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에서 바라보는 시야와 주변 경관이 크게 바뀌게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지난 4월 세운재정비촉진계획과 관련해 우려를 표명했다. 서울시의 재개발안이 종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만큼 계획 전체에 대한 유산영향 평가를 실시하도록 요청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시 발상은 세계유산특별법이 정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고 K-관광 부흥에 역행해 국익적 관점에서도 근시안적인 단견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총리는 또 “서울시는 더욱 신중하게 국민적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며 “K-문화, K-관광, K-유산 관점에서 이 사안을 풀기 위한 국민적 공론의 장을 열어 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시는 “세운4구역은 종묘 세계유산지구 바깥에 있고,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지정 범위에서도 약 180m 떨어져 법적으로 영향평가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건물들이 종묘의 정면이 아닌 양옆으로 지어질 것”이라며 “서울시의 계획이 문화와 경제를 모두 고려한 최적의 안”이라고 말했다. 오 시장은 또 “세운상가 고층 재개발이 오히려 종묘의 가치를 살리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오 시장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김 총리가 종묘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김 총리의 발언이 김건희 씨 관련 논란과 연결되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이라고 주장했다.
김건희 씨는 지난해 9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위패)가 있는 서울 종묘 사당의 ‘신실’을 공식 허가 절차 없이 지인들과 관람을 위해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신실은 종묘에서 가장 신성한 성역으로, 5월 첫째 주 일요일과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 치르는 대제(큰 제사) 때만 개방되는 곳이다. 김 씨는 종묘 망묘루를 사적으로 지인들과 차담회 장소로 무단 이용했다는 증언에 따라 특별검사로부터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김 씨가 국가유산을 사적으로 ‘유용’한 건 이뿐 아니다. 휴궁일인 2023년 9월 12일 경복궁을 비공개 방문했을 당시의 촬영한 사진이 최근 공개됐다. 김 씨는 특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국보 223호 근정전 안에 들어가 임금이 앉는 의자인 어좌(용상)에 앉았던 사실이 드러나 충격이다. 기행(奇行)에 가까운 행동이다.
김 씨는 2023년 3월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을 방문해 제2수장고에 도 들어갔다. 이곳엔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궤, 어진(왕의 초상화) 등 유물 2,100점이 소장돼 있다.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며 여러 단계의 보안 검색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출입할 경우 규정에 따라 기록을 남겨야 하는데, 김씨가 들어갔을 때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김 씨는 이로부터 사흘 후 윤 전 대통령과 함께 고궁박물관과 경복궁을 방문했다. 일반인 통제구역인 근정전, 경회루 2층, 향원정, 건천궁을 차례로 들렀다. 건청궁은 평소 닫혀있으나, 윤 전 대통령 부부는 경복궁 관리소 직원에게 문을 열도록 지시해 들어갔다. 이들은 건청궁 내 명성황후 침전인 곤녕합 방문을 열고 단둘이 들어가 10분가량 머무르다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비서실은 2023년 3월 14일 궁능유적본부로부터 보안 2점, 보함 2점, 주칠암 2점, 백동 촛대 1점 등 모두 9점의 공예품을 대여했다. 보안은 어좌(용상) 앞에 두는 탁자로 의례용 인장인 어보를 올려두는 용도로 쓰였고, 보함은 왕실에서 옥새 등의 중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공예품이다. 주칠함의 경우 붉은색, 즉 왕을 상징하는 색으로 칠한 상자로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물건이다. 대통령실은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인 올 4월 15일 9점을 모두 궁능유적본부에 반환했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때 크게 훼손됐다. 일제는 경복궁의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전각을 허물고 해방 후 중앙청으로 사용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지었다. 일제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중앙홀에서 낙성식을 열었고, 이날 오후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당시 친일파 핵심 관료들을 불러 연회를 개최했다.
2023년 12월 경복궁과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한 사건이 발생해 떠들썩했다. 불법 영상 공유 사이트 운영자인 강 모 씨의 사주를 받은 10대 소년의 범행이었다. 이들은 문화재 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임군은 장기 2년 단기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임군에게 범행을 교사한 강씨는 2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임군은 경복궁 담벼락에 실제로 낙서를 했다. 경복궁과 종묘를 무단으로 드나들고 ‘기행’을 저지른 김건희 씨는 역사와 국민의 ‘가슴’에 낙서를 한 것과 같다. 국가의 소중한 문화재를 사유물처럼 전횡한 김 씨는 사실상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다. 김 씨는 주로 왕을 상징하는 붉은색 함과 각종 장식품을 빌려 쓴 것으로 밝혀져 ‘왕 놀이’가 의심된다. 주술에 탐닉한 그의 전력을 감안하면, 신성한 경복궁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염려된다.
고가의 보석과 금붙이, 그리고 명품 백으로 치장한 채 국가의 소중한 문화재를 사유물처럼 전용한 김건희 씨. 그녀의 자리는 경복궁의 ‘어좌’가 아니라 재판정의 피고인석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