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굿뉴스] 천보라 기자 = 이보다 더 간절할 순 없다. 그의 간절함은 속된 말로 신마저 감동시켰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이야기다. 히스기야는 위기 때마다 통곡하며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 위기는 오히려 형통이 됐다. 대국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적군 18만 5,000명이 하루아침 송장이 되어 기적적으로 승리를 얻었다(왕하 18:13~19:37). 꺼져가던 생명이 15년 연장되고,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나는 징표도 받았다(왕하 20:1~11). 그의 절박함은 급기야 단단한 석회석으로 된 산을 뚫어 약 533m 지하 수로를 만들었다(대하 32:30). 최초의 터널 히스기야(실로암) 터널이다.

 ▲현재 발굴 중인 다윗의 도시 ⓒ데일리굿뉴스
 ▲현재 발굴 중인 다윗의 도시 ⓒ데일리굿뉴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며 그들이 돕더라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이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대하 32:2~4)

예루살렘 올드시티 성전산 남쪽 성벽 외곽에 위치한 다윗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사람이 거주했던 곳으로, 기원전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오래된 유적지다. 히스기야 터널을 비롯해 기혼샘, 실로암 등이 다윗의 도시에 있다. 올드시티 분문(dung gate)에서 출발해 도보로 5분이 채 안 돼 다윗의 도시에 도착했다. 다윗의 도시는 19세기 말 처음 발견돼 현재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유적만도 규모가 상당하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헤브론을 떠나 예루살렘에 왕궁을 세웠다. 다윗이 이곳을 수도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수원인 기혼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혼은 '터지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gih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기혼샘은 만성 물 부족을 겪던 이스라엘에 생명수와 같았다. 기혼샘은 식수뿐만 아니라 특별한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솔로몬의 왕위 즉위식이 대표적이다. 구약성경에는 솔로몬이 다윗의 노새를 타고 기혼으로 가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38~39)고 기록돼 있다.

 ▲히스기야 터널 입구로 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한참 내려가야 한다.ⓒ데일리굿뉴스
 ▲히스기야 터널 입구로 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한참 내려가야 한다.ⓒ데일리굿뉴스

기원전 701년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예측했다. 그는 앗수르가 기혼샘을 얻지 못하게 하고, 전시 중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대수로공사에 나섰다. 성 밖 기혼샘 물줄기를 메우고 지하 수로, 즉 인공 터널을 파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모은 것. 바로 히스기야 터널이다. 구약성경(왕하 20:20, 대하 32:30)에는 히스기야 터널에 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다윗의 도시와 함께 언덕 아래 묻혔고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고대 히브리어로 된 비문 ⓒ데일리굿뉴스
 ▲고대 히브리어로 된 비문 ⓒ데일리굿뉴스

성경으로만 전해지던 히스기야 터널은 19세기 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838년 미국 성서학자이자 탐험가인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이 첫 번째 측정에 성공했다. 이어 1867년 영국 고고학자 찰스 워런(General Charles Warren)이 본격적 탐사에 나서면서 히스기야 터널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후 1880년 한 소년이 터널에서 제1성전 시대 후기(기원전 8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고대 히브리어 비문을 발견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히스기야 터널임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비문은 발견된 지 10년 후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도난당했다. 현재는 터키 이스탄불 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비문에는 3,000여 년 전 공사의 역사가 기록돼 있다. 특히 당시 일꾼들의 극적인 만남과 생생한 감정, 당대 뛰어난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비문에는 "양쪽에서 자기 동료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며 "곧 터널이 맞뚫렸고 채석공들의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쳤다"라고 터널이 관통되는 순간을 묘사했다. 즉 히스기야 터널은 두 그룹의 일꾼이 반대 방향에서 서로를 향해 파고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533m 더구나 S자형으로 굽어진 터널을 정확히 맞뚫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터널이 S자형으로 굽어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왕릉을 우회하기 위해서라고 고고학자들은 주장했다.

 ▲순례객들이 손전등에 의지해 캄캄한 터널을 걸어가고 있다. 바닥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데일리굿뉴스
 ▲순례객들이 손전등에 의지해 캄캄한 터널을 걸어가고 있다. 바닥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데일리굿뉴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지하로 한참 내려가자 철망 아래로 기혼샘이 흘렀다. 곧 히스기야 터널 입구가 나왔다. 기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바지를 허벅지 위로 바짝 걷어 올렸다. 히스기야 터널의 최대 수심은 약 70m에 달한다. 순례객 대부분이 옷을 가져와 갈아입고 슬리퍼나 물놀이용 신발로 갈아 신었다. 터널은 성인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손전등에 의지해야 걸음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소요 시간은 30~40여 분이지만, 체감상 한 시간이 훌쩍 넘은 것 같았다.

 ▲히스기야 터널에서 나오자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여학생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히스기야 터널에서 나오자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여학생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멀리 빛이 새어 나왔다. 어둡고 좁은 터널의 끝에 실로암이 기다리고 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실로암은 기혼샘에서 흘려보낸 이른바 물 저장고다.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소경으로 태어난 자를 고치신 성지(聖地)로 잘 알려져 있다(요 9:1~12).

출구로 나가자 눈이 부시게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출구 앞 작은 못에서 종교인 여학생들이 단체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여학생들의 모습에서 어둠에서 빛을 찾은 기쁨이 느껴졌다. 이 못은 2004년까지 실제 실로암이 발견되기 전까지 실로암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실로암은 현재 발굴 작업 중으로 올해 온전한 모습이 공개될 예정이다.

3,000여 년 전 히스기야는 대국인 앗수르의 침략을 앞두고 있다. 앞이 캄캄하고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했다.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온전히 맡겼다(대하 32:7~8). 그의 절박함은 위기마저 형통하게 했다(대하 32:30). 어둠에서 광명을 찾고 목마름에서 생명수를 얻었다.

한국교회는 과거 주야(晝夜) 가리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초대교회 같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이 땅을 밝히던 십자가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성도를 밝히던 성령의 불씨는 사그라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목마름을 잃어버린 이때, 히스기야의 절박함이 유독 가슴 깊이 와닿는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찬송가 실로암)

천보라 기자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