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조용기 목사가 소천한 지 1년. 그가 생전에 한국 교회는 물론 세계 교회에 미친 영향은 일일이 꼽기도 어려울 정도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차일석 공로장로는 조 목사와 함께 여의도 시대를 연 인물이자 30년 동안 해외성회에 동행하며 수많은 기적의 현장을 목도했다. 30대 서울시 부시장, 여의도 시대를 열고 63빌딩을 세운 인물, 3개 언론사 대표 등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이력을 뒤로 하고 조 목사와 동행한 40년이 인생의 황금기이자 인생의 가장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는 차 장로를 만났다.

차일석 공로장로.ⓒ데일리굿뉴스
차일석 공로장로.ⓒ데일리굿뉴스

조용기 목사와 해외성회 동행 40년

머리 좋은 사람...타고난 목회자

“작은 누가로 섬길 수 있어 감사”

 

“조용기 목사는 목사입니까? 학자입니까?”

차일석 장로가 처음 건넨 말이다. 구순이 넘은 노(老)장로의 본질을 꿰뚫는 듯한 질문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목사 아닌가요?”

현문우답이다.

차 장로의 기억 속 조용기 목사의 첫 인상은 학자였다. 1960년대 당시 조 목사는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사조의 하나인 실존주의를 이용해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고는 했다. 기독교 철학자의 말도 자주 인용했다.

그는 “서울시 부시장에 선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6년 4월 권사인 어머니의 권유로 서대문교회(순복음중앙교회)에서 조 목사의 설교를 처음 들었는데 실존주의에 대해 설교했다”며 “평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히브리서 구절을 좋아했던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첫 설교에서 차 장로는 조 목사에게서 세계 선교의 가능성을 봤다.

그는 “조 목사는 학구적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실제로 미국인 선교사와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통역관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언어에 소질이 있었다. 게다가 논리 정연한 설교가 외국인들도 이해하기 쉬웠다.

5중복음(중생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 ‘3중축복(영혼과 범사 잘되는 축복, 강건하게 되는 축복)’, ‘4차원의 영성(생각 꿈 말 믿음)’으로 대변되는 그의 설교는 언어적 재능과 맞물려 세계 선교에서 수많은 결신자를 낳았다.

사실 조 목사의 세계 선교는 1964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한국하나님의성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미국하나님의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이었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것이 불씨가 돼 순복음의 한인교회가 하나둘씩 세워졌다

차 장로가 조 목사의 해외 성회에 동행한 것은 서대문교회에 출석한 뒤 1년쯤 지나서였다. 시작은 이스라엘이었다. 1967년 해외 성회 인도 차 독일을 방문 중이던 조 목사와 현지서 만났다.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였다.

차 장로는 “미국 출장 중 우연히 조 목사가 묶는 조그마한 여관에 들렀는데 혼자 빨래까지 해가며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면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존경했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차일석 장로.

이때 즈음부터 차 장로는 조 목사의 해외 성회 스케줄을 도맡기 시작했다. 집회 인도 요청이 들어오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조 목사의 결정을 도왔다. 차 장로 주도로 기독 실업인들이 힘을 보탰다. 팀을 짜서 성회마다 동행하면서 세계 선교에 힘을 실었다. 조선호텔 사장 재임 시절 세계 곳곳을 돌아본 게 도움이 됐다. 조용기 목사도 “해외선교 활동에 차일석 장로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종종 얘기할 정도였다.

순복음교회가 여의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사실 차 장로의 역할이 컸다. 1960년대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던 차 장로가 모래밭이던 여의도를 뉴욕 맨해튼처럼 만들겠다며 개발 계획을 주도한 것. 실제로 당시 여의도는 비만 오면 수시로 잠기는 한 마디로 쓸모없는 땅이었다. 오죽하면 “너나 가져라”는 의미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여의도 한 쪽에 종교 부지를 지정하고 적합한 교회를 찾았는데 하나님께서 서대문교회에 인도해주셨다”고 설명했다.

순복음교회의 여의도 시대가 열린 1973년 이후 세계는 한국의 순복음과 조용기 목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해외 초청하는 부흥성회가 많아졌고 조 목사는 가는 곳마다 성령의 바람을 일으켰다.

익히 알려졌듯이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린 집회마다 조 목사의 설교와 기도로 수백, 수천명이 결신하고 수많은 환자들이 치유됐다.

독일 성회에서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던 여성이 깨끗하게 낫고, 일본에서는 6년동안 두 다리를 못 쓰던 여성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했다.

차 장로는 “사실 기적의 역사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라며 “실존 철학이 발달한 독일에서는 집회 참석 후 실제로 병이 나았는지 의사들이 와서 환자들을 일일이 검진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파라과이를 초청 방문했을 때는 대통령이 직접 나와 장관들에게 안수 기도를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목회자가 한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안수하고 영어로 즉석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은 차 장로에게는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는 “조 목사는 정말 목회자로 타고난 인물”이라며 “더 많은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애썼다”고 말했다.

차일석 장로(왼쪽)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조용기 목사 초청 집회가 열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조용기 목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차일석 장로(왼쪽)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조용기 목사 초청 집회가 열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조용기 목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차 장로는 1980년대에 들어 방송에 주목했다. 조 목사의 설교를 TV를 통해 해외에서도 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이를 위해 미국 뉴욕에 CGI(국제교회성장연구소) 방송국을 개국,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TV 채널로 내보냈다. 미국 현지에서 전문가들을 영입해 시스템을 갖추고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재정도 독립시켰다. 필요한 재정이 제 때 채워지는 은혜도 경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세계 선교를 위해 실업인연합회장 하상옥·이병훈 장로, CGI후원회장 김용운 장로, 쁄라찬양단 백사라 전도사, 연예인선교회 전계현 권사 등을 보내주셨다”며 “그들이 있었기에 순복음이 세계 곳곳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1천만 구령 운동'가 시작됐다. 깅키TV에서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이름으로 교회 예배 실황과 조 목사의 설교가 일본 전역에 방송됐다.

차 장로는 조 목사와 동행한 지 30년이 지난 1996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예수 탄생 2000년 기념대축제를 끝으로 조 목사와의 공식 해외선교 사역을 마무리했다.

그는 2007년 출간한 저서 ‘복음으로 땅 끝까지’에서 “조용기 목사의 열정적인 해외선교 개척시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이 책을 집필했다”며 “‘40년 동행’은 내 인생의 가장 보람 있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차 장로는 조 목사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조 목사를 ‘바울’로, 자신은 선교 사역을 돕던 ‘누가’라고 고백한다. 화려한 이력 덕에 자신을 앞세울 법도 하지만 그저 작은 누가가 돼 조 목사의 세계 선교를 도왔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낮춘다.

그는 “내가 본 조용기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목사였다”며 “기적과도 같은 여정에 동행할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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