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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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일을 하는 것은 ‘젬병’이다. 웬만한 일은 아내가 알아서 처리한다. 시간을 다투며 바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여겨 봐 주는 것일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여유가 생긴 만큼 미안하다는 생각을 내심 하고 있다. 아내가 부탁을 하면 꼭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이달 초에도 그랬다. “반찬거리가 떨어졌다”며 “찌개를 만들 터이니 대파를 사다 달라”고 요구했다. 귀갓길, 집 부근 마트에 들러 채소 매장을 찾았다. 봉지에 담긴 대파는 양이 너무 많았다. 족히 50cm는 될 법한 대파가 대여섯 뿌리씩 담겨 있었다. 가격표에는 4,200원으로 적혀 있었다.

비싸기도 하고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집까지 따로 들고 가는 게 남사스럽기도 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단이 필요한지. 낱개로 한 뿌리가 필요한지 물었다. 아내는 낱개로 팔지 않을 것이라며 그냥 봉지째 사오라고 했다. 봉지에 담겨 있는 대파 한 단을 전해주며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푸념했던 기억이 있다.

2주쯤 지났을까 방송 뉴스를 지켜 보다 깜짝 놀랐다. 서울 강남의 농협 하나로 마트를 방문한 대통령이 대파 한단을 손에 쥐고 농협 측 인사,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대파 875원이면 그냥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말하자 농협 측 인사가 “원래 가격은 1천 7백원 정도 해야 하는데 할인된 가격”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장관을 향해 “다른 곳은 그렇게 싸기는 어려울 것 아닌지” 물었다. 장관은 ”5대 대형마트는 다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달 초 4,000원대였던 대파 한 단을 800원대로 판매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기자는 농민 보조와 마트 할인까지 들어간 전국 최저가 행사에, 정부 할인까지 추가된 가격이라고 설명했다. “당일 대파의 도매가격은 3,300원, 대형마트 권장 판매가는 4,250원이었고, 최고 7,300원에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고 기자는 덧붙였다. 파격적인 할인 소식에 사람들이 몰리며 그 마트에 할당된 대파 1천 단이 7시간 만에 소진됐다는 내용도 전했다.

며칠 뒤 동네 마트에 다시 들릴 일이 생겼다. 큰 길을 사이에 두고 마트와 대형 슈퍼 두 곳이 마주보고 있어 미끼 상품을 둘러싼 가격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대파 값은 다소 내렸지만 농협 하나로 마트와는 큰 차이가 났다. 비회원가 2,950원, 회원가 2,065원을 받고 있었다. 다음 날은 두 업체가 대파 한 단에 각각 3,580원, 3,500원을 책정했다. 

대파 가격이 화제가 되며 총선 유세장의 주요 이슈로 등장했다. 야당 국회의원 후보들은 대파를 들먹이며 정부의 물가 관리 실패를 공격하고 정권 심판론을 펼친다. 이에 맞서 여당 후보들은 “지난 정부 때 대파 한 단이 7천원이었던 적도 있다”며 정권 안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한 여당 후보는 “대파 875원은 한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대파를 뿌리로 파는 곳이 어디 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극단의 언어로 서로를 향해 혐오를 부추기던 선거전이, 민생 현안을 둘러싼 공방으로 옮겨 간 것은 다행이지만, 사안 자체가 우리 정치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지난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중국과 이른바 ‘마늘 분쟁’이 빚어졌다. 우리 정부가 2000년 6월 중국산 냉동 마늘과 초산조제 마늘의 관세율을 30%에서 315%로 대폭 올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취한 게 화근이 됐다. 중국이 반발해,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을 잠정 중단했다. 협상에 나선 정부는 중국산 마늘에 부과한 관세율을 낮추고 세이프가드 시한을 줄이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중국도 수입 중단 조치를 풀었다. 양국간 분쟁은 이듬해에 다시 불거졌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농림수산부 차관이 경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당사자이다. 

마늘이 외교 분쟁을 불러온 상황을 취재 일선에서 지켜봤는데, 이번에는 대파가 국내 선거전을 흔드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필수 농산물의 위력을 새삼 절감한다. 정부는 대파 못지 않게 다른 농산물 가격 앙등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등 경제 부처 장관들이 25일 경기도 성남의 농협 하나로 마트 매장을 방문해 가격을 점검하기도 했다. 

농산물 가격의 불안은 도시 소비자뿐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고민거리다. 전국 마늘조합 조합장들이 25일 모여 “채소 가격 안정제 기준 가격을 최근 5년 평균에서, 3년 평균으로 개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을 때 농민이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모임에 참석한 한 조합장은 “농산물 가격이 하락할 때는 정부가 방관하다가, 오르면 수입 카드부터 꺼내니 농민들 시름만 깊어진다”고 비판했다. 

일리가 있다. 최근 농산물 가격 불안으로 정부의 물가 관리나 경제 운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보여주기 식 물가 관리나 외국산 농산물 수입 등 일회성 대책을 찾는데 급급해선 안된다. 근본적인 물가 관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필수 농산물 수급 상황을 식량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하다. 선거와 관계없이 민생 안정이 정부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송기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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