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송기원 ⓒ데일리굿뉴스

시민이라는 말을 종종 접한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도 시민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750만 재외동포 여러분,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이라는 말로 취임 연설을 시작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던 전임 대통령의 연설에 ‘세계 시민’이라는 단어가 더해진 게 이채로웠다. 그 단어를 선택한 배경이 궁금했다.

요즘에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시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동료 시민’이라고 말하며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3일 경기도 김포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목련이 피는 봄이 오면 김포는 서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동료 시민이 원하면 저는, 국민의힘은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주사회 구성원으로, 권력 창출의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사전은 설명한다. ‘비판적 사고와 합리적 의사 결정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과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덧붙인다.

시민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시민은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특권층을 지칭했고, 절대 왕정기에는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유산 계급을 의미했다. 시민 혁명기에는 시민 사회 형성을 주도한 계층을 뜻했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시민은 대다수 사회 구성원을 포괄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영화 제목 속에도 시민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2017년 4월 개봉한 영화 ‘특별 시민’,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 후보와 상대 후보간 진흙탕 선거전을 소재로 삼았다. 제19대 대선을 10여 일 앞둔 시점에 개봉해 눈길을 끈 영화는, 탈법과 술수가 판치는 선거전을 통해 유권자들을 기만하고, 시민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인사’들의 추한 모습을 조명했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1940년대 미국 영화 ‘시민 케인’도 있다. 실패한 삶 속에 은둔 생활을 해오던 신문사 발행인 겸 대부호 찰스 포스터 케인이 ‘로즈 버드’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잡지사 기자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케인의 일생을 추적하다 어린 시절 즐겨 타던 썰매의 이름임을 마지막 순간 비로소 알게 된다. 대부호 케인의 삶을 통해 부귀영화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영화는 황색 언론 시대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 샌시미온 산마루에 있는 허스트의 대저택을 가 본 적 있다. 금으로 장식된 수영장, 화려한 연회장, 개인 극장, 잘 꾸며진 정원... 성채 같은 저택에서 내려다본 바다의 윤슬이 금처럼 빛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머리가 조금 길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시민 덕희’를 인상 깊게 관람했다. 주말 아침 관객은 거의 없었지만, 감동은 작지 않았다.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대출을 알아보던 세탁소 주인에게 어느 날 은행이라며 대출 제안 전화가 걸려 온다. 수수료 등 명목으로 3,000여만 원을 은행 관계자에게 송금한 이후에야 보이스피싱임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시민 덕희’에게 범인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이번에는 중국 칭다오의 모처에 갇혀 있다며 경찰 신고를 부탁한다. 

경찰에 알렸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자 시민 덕희와 직장 동료들은 칭다오로 찾아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행 장소를 확인한다. 조직의 총책이 한국인이며, 공항을 통해 곧 빠져나갈 것이라는 사실도 파악한다. 뒤늦게 신고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경찰이 공조 수사에 나서 총책을 검거한다는 내용이다. 영화 속 나미란, 염혜란, 장윤주 배우 등의 능청맞은 연기까지 더해 재미를 더한다. 

영화는 2016년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진 실제 상황을 소재로 삼았다. 화성의 소규모 세탁소 주인 김성자 씨가 주인공이다. 당시 MBC 시사 보도 프로그램 인터뷰에 응한 모습을 보니 여리고 연약한 여성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강단, 추진력이 나왔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영화는 픽션이 더해져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 상황은 영화보다 더욱 꼬여 있었다. 화성 동부경찰서는 김 씨의 신고를 받고도 묵살했다. 김 씨가 보이스피싱 총책의 본명과 인적 사항, 한국 입국 일시까지 알렸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김 씨가 총책의 사진, 중국 소재 사무실 주소, 보이스피싱 피해자 명부까지 단서로 제공하자 그때야 경찰은 행동에 나서 총책을 검거했다. 

그 후 상황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은 범인 검거 소식을 김 씨에게 알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보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최대 1억 원까지 받을 수 있다는 금융사기범 신고 보상금도 주지 않았다. 언론사 보도로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은 김 씨에게 보상금이라며 뒤늦게 100만 원을 건넸다. 김 씨는 돈을 받지 않고, 해당 경찰서의 업무태만과 신고 무시에 대해 경찰청에 진정서를 냈다.

영화 ‘시민 덕희’를 본 뒤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시민일까에 생각이 미쳤다. 영화 ‘특별 시민’속 캐릭터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시민 케인’ 속 부귀영화를 누려본 인물도 물론 아니다. 정당한 행위조차 공권력에 의해 무시당하기 일쑤인, 우리 주변에서 흔히 불 수 있는 열심히 사는 소시민의 모습 아닐까. 

문득 인두세를 거부하며 수감됐던 경험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의미를 일깨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술 ‘시민 불복종’을 떠올려 본다. 180여 년 전 미국에서 그는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하여 막을 때에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고 설파했다.
 
시민의 개념은 변화했지만, 시민 의식은 꾸준히 발전해 왔다. 선거철 유권자인 시민들을 대상으로 욕망 투표를 자극하며 실현 가능성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데 대해 분별력을 갖고 제대로 대처하는 것, 요즘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이자 품격 아닐까. 

송기원 언론인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