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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가지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는 용어를 사용해 논란에 휩싸인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NAP)이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할지 여부를 두고 교계 안팎에서 관심이 뜨겁다. '성평등' 용어에 대해 어떤 우려가 존재하고, 실제 제3차 NAP에서는 어떻게 사용됐는지 소관 부처의 입장을 들어봤다.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성평등 관련 용어 '급증' 기자가 직접 검색한 결과 2012년 수립된 제2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NAP)와 비교했을 때 이번 제3차 NAP 초안에서는 성평등 관련 용어가 눈에 띄게 늘었다. '양성평등'이 9번, '성평등'이 5번으로 총 14개가 검색된 제2차와 달리 지난 4월 법무부가 발표한 제3차 NAP에서는 '양성평등'이 43번, '성평등'이 28번으로, 성평등 관련 용어가 5배 이상 증가했다. 동성애·동성혼 개헌 반대 국민연합 등 기독교 단체들은 여성과 남성 뿐 아니라 50여 가지의 성 정체성을 평등하게 인정하는 '성평등' 단어의 사용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과천청사 앞에서는 제3차 NAP에 사용된 성평등 용어를 양성평등으로 바꿀 것을 촉구하는 삭발식까지 단행됐다. 노숙투쟁에 이어 이날 삭발에 나선 길원평 교수는 "'양성평등'은 sex equality이고 '성평등'은 gender equality를 의미하는 명백히 다른 용어"라면서 "성평등 용어가 보편화될 경우,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 이외에 수십 가지의 사회적 성이 인정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양성평등'과 '성평등' 용어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제2차 양성평등 기본계획에서도 기존의 양성평등 용어를 성평등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교계가 크게 반발하자, 여가부는 용어변경 시도를 축소하며 한 발 물러섰다. 당시 여가부 관계자는 "성평등과 양성평등은 gender equality를 번역한 용어로서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양성평등기본법에서도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며 "성소수자를 고려해서 성평등이란 용어로 변경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어 "두 용어는 의미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한쪽 용어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며어느 한 단어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부,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 명확한 입장 정리해야 하지만 전문가들은 성평등 용어가 법제화 된 프랑스 등 외국의 선례를 봤을 때, 성평등 정책은 결국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를 보호하는 차별금지법으로 귀결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공동대표 전용태 변호사는 "성평등은 각 개인이 타고난 생물학적 성 이외의 성별을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면서 "실제 성평등 용어를 도입한 영국과 스웨덴에서는 아빠와 엄마라는 단어 사용이 금지되고, 스위스에서는 공식 서류에 parent 1, 2라는 '성중립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만일 제3차 NAP에서 임의로 성평등을 양성평등의 줄임말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성평등은 양성평등의 줄임말이다'라는 기재를 명확히 해서 개념의 혼선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른 의미의 단어임을 알면서도 마치 줄임말인양 사용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암묵적 기망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양성평등 이념을 채택한 현행 헌법과 배치되는 성평등 정책을 행정부가 시행한다면, 이는 법치 행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만일 '성평등' 용어가 양성평등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조속히 용어 정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라면서 "정확하지 않은 단어나 문장은 후에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야기하는 독소 조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석대 대학원 김상구 교수와 박사과정팀 21명이 2018년 7월 2일(월)부터 7월 13일(금) 까지 독일, 스위스, 프랑스, 체코, 오스트리아 등 5개국의 유럽종교개혁 현장을 탐방했다. 유럽은 종교개혁자들과 경건주의 영적 거장들의 심장이 생생히 숨 쉬는 현장이다. 또한 통일과 음악, 예술, 미술, 문화 분야의 위대한 유산이 남겨져 있는 땅이다. 7월 2일(월) 인천 공항을 출발한 종교개혁 탐방팀은 늦은 밤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탐방 2일째인 7월 3일(화), 아침 일찍 먼저 바스티용 공원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를 찾았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에 대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던 4명의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인 파렐, 칼빈, 베자, 낙스의 인물상이 감동이었다. 그리고 칼빈이 목회했던 성 베드로 교회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낙스가 칼빈의 도움으로 1556년에서 1559년 까지 3년 동안 영국 피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말씀을 선포하였던 칼빈 강당도 보았다. 제 3일째 7월 4일(수), 탐방팀이 방문한 울리히 츠빙글리의 목회지 그로스뭔스터교회 철문에는 츠빙글리의 생애와 개혁활동을 묘사한 24개의 동판이 새겨져 있었으며, 교회 밖에 성경과 검을 들고 있는 츠빙글리 동상이 감동이었다. 예배에서 라틴어 대신에 일반 시민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미사를 인도했던 츠빙글리의 개혁적인 목회가 도전을 주었다. 교회 본당 입구 오른쪽 벽면에 붙어 있는 석상은 츠빙글리 이후 취리히 종교개혁을 이끈 하인리히 불링거를 볼 수 있었다. 근처에는 여성을 위한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취리히 프라우뮌스터 교회를 둘러보았다. 탐방팀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가 목회했던 성 아우렐리아교회와 성 토마스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안에는 부처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었다. 마틴 부처는 종교개혁 당시 교회 연합을 위해 힘썼다. 그의 교회 연합 정신에 큰 도전을 받았다. 한국교회에 교회연합이 잘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또한 칼빈이 프랑스 난민들을 위해 목회했던 부끌리어 개혁교회도 찾았다. 이 교회에서 칼빈은 1538년 4월부터 1541년 9월까지 약 3년 동안 500명의 프랑스 망명자들에게 설교와 성경, 교리를 가르쳤다. 탐방팀 일행은 칼빈의 신앙이 우리 안에서 다시 회복되도록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알버트 슈바이처가 목회했던 성 니콜라스 교회와 인쇄술을 발명했던 구텐베르크 동상, 매우 웅장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던 스토테른하임에서 다함께 기도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제 4일째, 7월 5일(목) 오전에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이 일어났다. 수도사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들과의 논쟁에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과 종교개혁에 대한 변론을 했다. 루터의 논쟁을 기념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 바닥에 명판이 새겨져 있다. 이어 칼빈의 사상을 따르며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을 작성했던 성령교회와 하이델베르크 고성,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감옥 등을 탐방했다. 하이델베르크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붉은 빛깔의 지붕들과 건너편 철학자의 산책로, 아름다운 네카어 강 등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탐방팀은 1521년 4월,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보름스에 도착했다.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장소는 보름스 성당이 아니라 성당 부속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건물이 없고 하일스 궁전 공원으로 꾸며졌다. 루터가 출두한 그 지점에 기념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1521년, 마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땅바닥에는 루터의 신발 모양이 새겨져 있다. 보름스 대성당으로 부터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루터 종교개혁 기념동상을 찾았다. 이 동상에는 12명의 믿음의 개혁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어두운 시대에 담대하게 복음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이다. 그들의 믿음에 큰 도전이 되었다. 또한 벽 안쪽에는 당시 종교개혁을 따른 30여개 도시를 기념하여 둥근 문장에 각 도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다함께 단체사진을 촬영한 후 이동했다. 제 5일째, 7월 6일(금) 탐방팀은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부하들을 시켜 고향으로 돌아가는 루터를 납치하여 피신시켰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루터는 외르크 융거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머리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면서 기사로 변장했다. 10개월 동안 숨어 살았던 루터는 3개월 만에 헬라어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신약성경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었으며, 마귀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루터의 삶은 우리들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또한 마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루터하우스와 게오르크 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독일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반스찬 바흐가 태어난 생가와 박물관, 바흐 동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 교회음악을 했던 바흐의 신앙이 위대하기만 했다. ▲제네바 바스티용 공원에 세워진 종교개혁기념비 앞에서 사진촬영 하고 있는 탐방팀ⓒ데일리굿뉴스 탐방팀은 스토테른하임에 도착했다. 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날, 순간 다가올 심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빠진 루터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곳이다. 루터의 서원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 높이 2m의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이곳은 루터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탐방팀은 루터처럼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다함께 합심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루터가 공부했던 에르푸르트 대학교와 서원 후 2주 만에 루터가 찾은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았다. 1507년 4월 3일,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신성한 사제 서품을 받았던 에르푸르트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제 6일째, 7월 7일(토) 탐방팀은 아이슬레벤을 찾았다. 루터가 태어났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루터 출생 무렵에 사용된 요람, 침대, 가족의 문장, 독일어 성경, 종교개혁자들의 그림, 루터가 자필로 쓴 편지와 원고, 루터를 표현하는 백조상을 볼 수 있었다.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성 베드로- 바울교회와 루터가 임종 전에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성 안드레아스 교회를 찾았다. 또한 1546년 2월 18일, 루터가 임종했던 방을 둘러보았다. 이 사가에는 루터가 마지막으로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누워서 죽음을 맞이한 침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아이슬레벤 마켓 광장에는 1883년 루터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루터 동상이 세워졌다. 왼손에는 성경을, 오른손에는 불에 태워버린 교황의 파문장을 들고 있었다. 루터의 설교와 저술, 믿음, 열정, 용기, 기도, 복음중심적인 삶에 큰 도전을 받았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승리자였다. 탐방팀은 종교개혁의 진원지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먼저 루터하우스(종교개혁 박물관)와 교황청으로부터 신부를 위협하는 파문장을 불태웠던 곳, 옛 비텐베르크대학 건물, 필립 멜란히톤의 집과 박물관, 루카스 크라나흐의 생가,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 비텐베르크 시교회, 요하네스 부겐하겐의 집과 동상, 1517년 95개 논제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교회를 둘러보았다. 이 교회 안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무덤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비텐베르크는 정말 감동이었다. ▲모라비안 교회에서 다함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 ⓒ데일리굿뉴스 제 7일째, 7월 8일 오전에는 베를린 장벽과 체크 포인트 찰리,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홀로코스트 기념비, 베를린 돔교회를 탐방했다. 이어 베를린비전교회(김현배 목사)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백석대학교 교수 김상구 목사는 '참된 예배자의 삶'(시 73:1-9, 17, 27-28)으로 말씀을 전했다. 예배 후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식사 후 탐방팀은 독일 돔교회 저녁예배에 참석하여 현지교회 예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제 8일째, 7월 9일(월) '엘베강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드레스덴에 도착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영적으로는 독일 경건주의 지도자 진젤도르프가 태어난 고향이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개혁사상을 받아 들였던 프라우엔 교회가 아름답고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츠빙거 궁전과 젬퍼 오퍼, 브륄의 테라스, 작센 군주들의 행렬인 슈탈호프 벽화 등을 감상했다. 탐방팀은 모라비안 형제들의 흔적이 가득한 헤른후트에 도착했다. 모라비안 교회와 모리비안 박물관, 모라비안 묘지를 보고서 마지막으로 언덕 위에 있는 후트버그 기도탑에 올랐다. 모라비안들은 이곳에서 하루 24시간, 365일, 무려 100년 이상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기도생활과 세계선교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탐방팀은 모라비안 교회와 후크버그 기도탑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사역했던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다. 후스가 목회했던 베들레헴 교회와 후스 동상, 후스파의 근거지였던 틴 성당, 구 시청사와 시계탑, 순교자 27인 기념 현장, 카를다리, 바츨라프 광장 등을 둘러보았다. 성경대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었던 후스는 교황권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다 화형 당했다. 순교자 후스의 신앙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그는 순교당하기 전까지도 진리 위에 굳게 서 있었다. 후스 동상에 새겨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라"는 그의 명언은 큰 도전이 되었다. ▲마틴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았던 성 마리엔 성당 ⓒ데일리굿뉴스 제 9일, 7월 10일(화) 음악의 양대 산맥인 비엔나를 찾았다. 이곳은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체르니 등 18-19세기 유명 음악가들이 태어나거나 활동했던 음악의 성지이다. 쇤브룬 궁전과 슈테판 성당을 보고서 잘츠부르크를 향했다.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다. 모차르트 생가와 미라벨 궁전과 정원을 찾았다. 이곳 두 도시를 떠나면서 탐방팀의 가슴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음악의 천재요 가곡의 왕 슈베르트와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음악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칼빈처럼 하나님 중심,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면서 탐방팀은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로 떠났다. 아름다운 호수와 어우러진 할슈타트 마을 풍경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밤이었다. 모두가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10박 12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1년 전부터 김상구 교수와 준비팀이 수고 많이 했으며, 종교개혁 현장에 대한 설명은 김현배 목사가 해주었다. 탐방팀 일행은 7월 13일 금요일 인천공항에 건강한 모습으로 잘 도착했다. 종교개혁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귀하다. 더 값진 것은 종교개혁현장을 탐방하는 것이다. 타락하고 어두운 시대에 복음에 사로잡혀 진리 위에서 굳건하게 살았던 종교개혁자들의 믿음과 신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불꽃같은 삶과 메시지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에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탐방팀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 교수 사역과 목회 현장에 리바이벌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사역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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