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다.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영화인들이 정장을 차려 입고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시상식장 주변의 살풍경한 경계망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올해 제 9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으로 가는 길 역시 경비가 강화됐다. 올해는 특히 시위대가 몰리면서 입장이 허용된 관객이나 취재진은 물론이고 유명 스타들까지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를 내려 걸어가야 했다.

아카데미상 소개 영상을 지켜보다, 며칠 전 관람한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배우 마크 러팔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열연을 펼쳐 아카데미상 남우 조연상 후보로 선정된 터였다. 

그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향해 “팔레스타인 시위가 오늘 밤 오스카 시상식을 중단시켰다”며 “인류애가 이겼다”고 지지의 뜻을 밝혔다. ‘전쟁 중단’을 요구하며 피켓 시위를 벌이는 이들은 지지하는 시상식 참석자는 그 뿐만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스타들이 시위의 취지를 이해하고 공감을 표시했다.  

마크 러팔로가 눈에 띈 것은 그의 가슴 쪽에 단 빨간 배지 덕분이었다. 배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의 중단을 촉구하는 예술인들이 만들어 낸 상징물이었다. 배지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보낸 공개편지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죽음과 공포를 목격하고 있다”며 “미국 대통령으로서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니퍼 로페즈 등 배우 400여 명이 서명한 편지였다.

빨간 배지는 시상식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지난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푸른색 리본과 우크라이나 국기 문양을 본뜬 장식용 수건을 착용한 배우들이 많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마크 러팔로의 수상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영화 속에서 천하의 바람둥이 역할을 연기했다. 지적으로 미숙하고 집에 감금돼 살아온 여성을 꼬드겨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유럽 곳곳을 돌며 사랑 놀음을 벌이다, 있는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마침내는 버림받는 남성으로 열연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남우 조연상 후보에 만족해야 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대세에 밀렸다. 원자 폭탄을 개발했지만 훗날 평화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소련의 첩자로 몰려 수사기관으로부터 미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 인물,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연금 혜택까지 박탈당했지만 미국을 배신하지 않은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 남우 조연상 등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 박사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는 남우 주연상 수상 소감을 통해 “우리는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고, 좋든 나쁘든, 우리 모두는 오펜하이머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며 현실을 언급했다. 그리고는 “모든 곳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 순간을 바친다”며 전쟁 반대의 목소리에 동참했다.

시상식에서 눈길을 끈 또 다른 영화는,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마리우폴에서 20일‘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함락되기 직전인 지난해 2월, 포위된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벌어진 참상을 그린 작품이다.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던 그곳에 체르노프 감독과 AP 통신 기자가 3주동안 머물며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감독은 수상 소감을 통해 “이 상을 공격하지 않은 그런 역사와 맞바꿀 수 있다면 교환하고 싶다”며 “영화는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2개의 전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현 지구촌 상황을 감안하면, 세계인의 눈과 귀가 쏠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의 안팎에서 전쟁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더욱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가 역할을 하지 못하는 판국에 말이다.

시상식 말미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순서에 라이언 오닐, 사카모도 류이치 등과 함께 고 이선균 배우가 소개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 무대를 밟았던 그였기에 더욱 애석하다.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올해 시상식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시상식 진행을 맡은 토크쇼 사회자 지미 키멜이 오프닝 멘트를 통해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반박한 공화당 의원의 발언을 풍자하자, 공화당 유력 대선 후보인 트럼프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그를 “최악의 진행자”라고 비판했다.

키멜은 휴대폰을 보며 트럼프의 글을 소개한 뒤 이렇게 응수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다. 아직 깨어 있다니 놀랍다. 감옥에 갈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사회자의 거침없는 발언에서, 아카데미상 수상작 선정에서, 그리고 할리우드의 반전 시위에서 미국 수정 헌법 제 1조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의 의미를 되새긴다. 

송기원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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