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을 향한 진리의 횃불
 
1513년 이후 루터의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행한 시편과 로마서의 강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 관한 ‘성경적 비전’을 열어주었다.

이와 관련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의 판매는 성상숭배에 관한 이미지의 문
▲안용준 목사ⓒ데일리굿뉴스
제와 시기적으로 중첩돼 혼란한 사회의 자화상을 연출하면서 보다 확대됐다. 급기야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Ⅱ, 1503~13)는 일을 내고야 만다. 로마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 데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완전 면죄부’를 공고했던 것이다. 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10세는 이 일을 확대 계승했다.

이탈리아 메디치(Medici)가 출신인 레오 10세는 자신의 가문에서 익힌 상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위세는 독일의 막데부르크(Magdeburg)와 마인츠(Mainz)에서도 이어졌다. 1515년 3월 31일 그는 지역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에게 마인츠, 막데브르크, 란덴브르크에서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완전 면죄부’를 8년간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했다.

실제로 ‘완전 면죄부’는 교황이 직접 제시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죄에 관계했다. 이 면죄부를 판매할 동안에는 다른 모든 면죄부는 폐지됐다. 이 면죄부에 대한 설교 때문에 다른 모든 설교는 중단되어야 했다. 이 면죄부에 대한 방해는 법으로 금지됐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또 있었다. 도미니크 소속의 수도사, 테젤(Johann Tetzel, 대략 1465-1519)이다. 그는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교황의 면죄부를 선전하고 다니고 있는 터였다. 그의 설교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연보궤 앞으로 나아가 헌금을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 받은 면죄부는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이 되는 거다.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러한 의식을 매우 고상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해갔다. 드디어 1517년 4월 테첼은 삭소니 선제국(Elektorat Saxony) 경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비텐베르크 시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 일은 루터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즉시 여러 주교들에게 이 일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면죄부를 향한 태도를 95개 조항으로 조목조목 정리했다. 원래 이 논제는 세상에 공포하려는 의도나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먼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리한 글을 브란덴부르그의 주교 제롬과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발송했다.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Schloβkirche)의 정문에 격문을 붙이게 되었다. 한 젊은 수도사의 진리를 향한 열정은 한층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행동의 결과에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루터 자신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보름 만에 온 독일로 신속히 펴졌으며, 6주 후에는 온 유럽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온 세상이 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외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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