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문제

작년 우리 사회는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로 전국민이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이 사태는 결국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안을 국회에서 가결시키는 데까지 이르렀고 앞으로의 정치 일정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역시도 큰 혼란을 경험했다. 위정자들의
 ▲정재영 교수 ⓒ데일리굿뉴스
권위에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87년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통령지지 모임에 참여해 더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아직도 일치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나 참여의 문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고려돼야 한다. 국정 농단 사태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원칙과 절차를 따르기보다 편법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갑질 논란’ 등 공정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 끊이지 않고 이슈가 되며 우리 사회에 과연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돼 왔다. 이른바 절차상의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 실제적인 민주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표면으로는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듯하지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움직여가는 데에서는 여전히 편법과 부정이 더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우리 사회는 서양에서 30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서서히 경험한 근대화의 변화를 불과 5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를 거쳐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 사회를 지배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정했던 규범도 크게 바뀌게 됐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혼란 가운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규범과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일어나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아직도 전통적인 사고에 이끌리는 우리 사회에서는 불명확한 규정이나 절차의 허점을 노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상황이다.

공공성을 좇는 시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정의의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매우 오래된 주제이다. 신학에서 논의되어 온 정의의 문제는 주로 정의의 개념에 대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정의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롭지 못한 현상들이 빈발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이상일 뿐 현실 상황과 부합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에 이르는 길은 어느 정도의 부정이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어렵다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공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공공성이 무엇인지 몰라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 행위자들 스스로가 예외 없이 강력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통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규범과 제도적 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인들 안에 내재하는 이기심을 억제하고 시민 도덕심으로 결속하도록 하는 규범 말이다. 도덕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돼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소수에 대한 배려와 약자 보호를 기대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등장하고 이윤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행위 동기로서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 특히 경제 발전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곧 미덕이 되어버렸고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서 성공의 사다리에 높이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며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결과에 따라 정당화돼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돼 왔지만, 최근에 사용되는 시민이란 용어는 특정한 부류의 계층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특정한 가치와 행위를 뜻하는 말로 더 자주 사용된다. ‘시민다움’이란 말이 그러한 보기다. 이때 시민은 ‘시민다움’의 가치와 그 가치에 바탕을 둔 시민지향성의 행동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시민이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시민의 모델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착하게 살라는 교훈으로 이야기 되지만,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만 이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하등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당시 사회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웃의 범위를 이방인으로까지 확대하셨다. 그것은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 시민으로서의 책임

우리는 여기서 현대 사회에서 얘기하는 ‘시민’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시민은 결코 약자나 사회 소수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민다움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적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하듯이 바른 ‘시민’의 덕성도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충분히 교육시킨 후에야 사회에 내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으나 충분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수준을 정하기 어려울뿐더러,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의 자리가 교회가 아닌 교회 밖 사회이므로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성경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련돼야 한다. 모든 일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양심에 따라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안내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아야하고, 기독교 시민의식을 갖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돼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양심 있는 시민이 되도록,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정치 문제들에 대해 잘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지하거나 반대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공청회나 지역사회 회의나 의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시민으로서 그들이 관심 갖는 단체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권장돼야 한다. 극심한 격변기를 거치고 있는 이때에 세월호 참사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각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시민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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