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교회 ⓒ데일리굿뉴스
 ▲교토교회 ⓒ데일리굿뉴스

[데일리굿뉴스] 천보라 기자 =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는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힌다. 일본 특유의 국민성‧정신성을 잘 느낄 수 있는, 이른바 가장 일본스러운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교토는 1,000~2,0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대규모 신사와 총본사, 사찰 등이 가득해 극락정토(極樂淨土)라 불리는 우상숭배의 땅이다. 그렇다 보니 교토에서는 십자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서도 무려 100여 년간 예배의 자리를 지켜온 교회가 있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재일대한기독교회 교토교회다. 교토교회는 교토에서 가장 큰 면적의 행정구인 우쿄구에 위치해 있다.

교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도를 따라 5분 정도 걷다 보니 주택들 사이로 높이 솟은 십자가가 보였다. 지금의 교회는 2005년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재건축된 신축 예배당으로 2007년에 완공됐다.

교토교회는 1923년 유학생과 주부 등 교토에 거주하던 몇몇 조선인들의 예배로 시작됐다. 3년 후인 1925년 당시 교토대학교 의과대학원생이던 최명학 씨가 4~5명을 모아 놓고 예배를 인도하면서 정식으로 교회가 창립됐다. 교회는 1930년 고베중앙신학교 출신의 새내기 목회자 최경학 목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았다. 조선인들의 구심점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이름도 '교토중앙교회'로 바꿔 새롭게 출발했다.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최 목사는 밤낮없이 유학생과 노동자들을 심방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극심한 차별과 억압, 횡포에 설움과 고통받던 조선인들에게 위로와 용기, 희망의 말씀을 전했다. 최 목사의 헌신적인 목회로 교토 전역의 조선인들에게 복음이 확장됐다. 그가 부임할 당시 10여 명이었던 출석 교인 수는 3년 만에 50여 명으로 늘었다. 최 목사는 교회의 기틀 확립과 체계적인 운영을 위해 제직회와 청년회 등을 조직했다. 또 1935년 지금의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건축해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었다.

 ▲1938년 교회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 ⓒ데일리굿뉴스
 ▲1938년 교회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 ⓒ데일리굿뉴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거셌다. 최 목사와 교인 박상동 씨의 과거 3.1운동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최 목사는 1919년 대구에서 진행된 3.8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일경에 붙잡혀 투옥됐다. 박 씨는 6년간 옥고를 치렀다. 특히 당국은 교토에 조선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교토 경시청은 교회 예배당을 폐쇄하고 최 목사와 교인들을 특별 감시했다. 최 목사와 교인들은 예배당의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최 목사는 부임한 지 5년 만에 스스로 교회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치안유지법 위반 전과자로 요시찰 인물인 데다 일본어가 능통하지 않아 당국과 교섭이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목회자가 부임하면 예배당 사용이 허가되리라 생각했다. 교인들이 만류했지만 최 목사의 결심은 단호했다. 교인들에게 최 목사의 헌신적인 목회는 목회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모두 최 목사의 사임에 못내 아쉬워했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후임 노진현 목사는 제일 급선무였던 예배당의 사용 허가를 위해 고베중앙신학교 동문 목회자와 교수 등 일본인들과 협력해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당시 중일전쟁 발발과 신사참배 등으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일경은 일본 땅에 있는 조선인교회를 민족 세력 집단으로 규정했다. 예배당은 헌당식조차 드리지 못한 채 3년간 봉쇄됐다. 노 목사는 부임한 지 3년 만인 1938년 자진 사임했다.

전인선 목사가 부임해서도 예배당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일본 기독교인들도 적극 나섰다. 목포주재 영사였던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당국을 직접 찾아 관계자를 설득했고 마침내 예배당 허가가 났다. 예배당 완공 5년 만인 1940년 4월 비로소 입당식 예배를 드리게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제가 1939년 제정한 종교법에 의해 소속 교단 재일본조선기독교회가 해산되자, 교회는 일본기독교단에 편입돼 전도소로 전락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교토교회 대예배당. 일제의 탄압으로 입당예배를 드리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데일리굿뉴스
 ▲교토교회 대예배당. 일제의 탄압으로 입당예배를 드리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데일리굿뉴스

고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당 8개월 만에 전 목사가 오사카로 전임하면서 목회자가 없는 무목교회가 됐다. 게다가 일제의 억압과 수탈이 심했던 전시체제기였다. 일제는 교회를 향한 노골적인 탄압을 가했다. 일본어 예배와 창씨개명은 비통한 일이었다. 설교자는 물론 주일학교 교사들까지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고, 제직회 등 각 기관 회의록과 명단도 모두 일본어로 작성해야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사상범으로 구속됐다. 하지만 교인 대부분이 일본어를 몰랐다.

가장 큰 역경은 신사참배와 궁성요배(宮城遙拜·일본 황실이 있는 동쪽을 향해 고개 숙여 절하는 것)였다. 일제는 예배드리기 전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예배드리기 위해 우상숭배를 해야 하는 모순이었다.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거부하면 교회 모든 활동을 금지하고 치안유지법과 괘씸죄를 적용해 마구 잡아들였다. 교토의 몇몇 교회가 폐쇄됐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구속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당했다. 교토교회도 당시 도시샤대학 신학부에 재학중인 옥경석 전도사 등이 피검됐다.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6~7명만이 남았다. 

1945년 전쟁이 길어지자 일제의 만행은 극치에 달했다. 교회에서는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4대 목사로 부임한 다구치 마사토시 목사와 교인들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다. 인적 자원뿐만 아니다. 일제는 교회의 종이나 가정집의 숟가락, 젓가락 등 물적 자원까지 모조리 수탈했다. 일본 각 도시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군의 폭탄 세례가 쏟아졌다. 교토는 폭격을 피했지만, 늘 공습에 대한 위협과 공포에 시달렸다. 일부 교인은 귀국선에 올랐다. 하지만 궁핍했던 교인 대부분은 마음대로 떠날 수조차 없었다.

일본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중에서는 연합군의 삐라가 살포됐다. '일본은 항복하게 되고 조선은 독립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조선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급기야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고 일본의 패망을 바라는 조선인들을 모두 때려죽여야 한다는 막말까지 나돌았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아픔이 떠올랐다. 험악한 분위기에 일본 농어촌이나 산골에서 노동자로 살던 조선인들은 도시로 몰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와 고난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일어났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드디어 조선이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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