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교수 ⓒ데일리굿뉴스
 ▲박태식 교수 ⓒ데일리굿뉴스

이제까지 신약성경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둘러봤으며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또한 각론으로 들어가 네 복음서의 특징들을 한 편씩 다뤘다. 

이제 시선을 조금 옮겨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여 동안 그분을 쫓았던 이들이 맺은 관계를 살펴본다. 이 가운데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의 관계에 집중할 작정이다. 

사실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은 대부분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예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겠는가? 세리, 병자, 창녀, 어부, 여자 등 죄인들의 처지가 다 그렇다고 이해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논쟁 상대나 대화 상대가 됐음은 당연한 이치다. 물론 제도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과 토론을 즐겼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동료로 여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재야의 종교인이었다. 

예수님은 사제 집단인 사두개파도 아니었고, 학자들을 주로 배출한 바리새파와는 율법 해석에 거리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종교·사회적으로 지도층이었던 장로도 아니었다.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보기에 일반 백성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수도 생활에 정진했던 에세네파처럼 그리 경건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이리저리 떠돌면서 하나님을 전하던 유랑전도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는 엄청나게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위기감을 느낀 종교지도자들은 힘을 모아 그분과 일행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에겐 넘어야 할 벽이 있었는데, 섣불리 물리력을 쓰다간 자칫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제지하려는 것으로 여겨져 백성의 폭동을 유발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온 예루살렘이 그분을 반겼고(막 11:8~9) 이에 두려움을 느낀 종교지도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잡아 죽일 방도를 의논하면서 했다는 말이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막 14:2)였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에는 예수님과 같은 유의 재야 종교지도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인물로 세례요한과 유다와 드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제도권에 의해 가차 없이 제거됐다(막 6:17~29, 행 5:33~37).  

종교지도자들은 ‘사이비 메시아’ 예수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예수님이 율법 규정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스스로 율법의 전문가로 여겼으니 이 방법을 쓰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논쟁을 벌이면서 종교·정치·사회·문화적으로 까다롭고 민감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넘치는 지혜와 막강한 화술로 무장된 선생이었기에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는 답변을 내놨다. 예수님의 논쟁 사화가 갖는 최고 매력이다. 그렇다면 논쟁 사화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살펴보자.

박태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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