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우 칼럼] 보은의 세월

2025-11-12     정재우 대표
 ▲정재우 대표(가족행복학교, 평택교회 원로목사)ⓒ데일리굿뉴스

살아오며 수많은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날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슴이 벅찬 적은 없었다. 냉소가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인간의 선함과 은혜의 향기를 이렇게 깊이 느낀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것은 ‘보은(報恩)의 시간’이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반세기 만에 되돌려주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내 대학 동기 윤상희 목사. 올해 일흔하나가 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심장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의학적으로 ‘활로씨 사징’이라 불리는 희귀 질환이었다. 푸른 입술로 숨이 가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는 15세 이전에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리고 1975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 선천성 심장수술의 개척자 조범구 박사의 집도로 운명 같은 수술을 받았다. 그날의 수술은 단순한 의료행위가 아니라 한 생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 ‘창조의 순간’이었다.

그 후 50년,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심장에 이상이 생겨 2015년 인공판막을 이식하는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두 번의 수술 모두 성공이었다. 그리고 올해, 그는 그 은혜의 50년을 기념하며 자신을 살려준 이들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단순한 감사의 식사가 아니라, ‘은혜의 역사를 기억하는 예배’였다.

그는 수소문 끝에 50년 전 자신을 수술해준 조범구 박사를 찾아냈고, 수술 당시 헌혈해준 신학대 동기들과 자신을 위해 기도했던 이들까지 모두 초대했다. 

서울의 한 한식당, 고요한 룸 안에 40여 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는 눈물과 감사, 그리고 인간애의 향기가 가득했다. 윤 목사는 조심스레 다가가 조 박사 부부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선생님이 제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살아 숨 쉬는 이 모든 것은 은혜입니다.”

조 박사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나는 조물주가 아닙니다. 다만 그분께서 내 손을 빌리셨을 뿐이지요.”

그 짧은 대화에 인생의 깊은 울림이 있었다.

조범구 박사는 평생을 국내외 선천성 심장병 환아들을 위해 헌신해왔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무료로 수술했고, 각국 의사들을 불러 연수를 시켜 자신들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치료하도록 돕는 일을 해왔다. 그의 인술(仁術)은 곧 복음이었고, 의학을 넘어선 ‘사람의 길’이었다.

윤상희 목사는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 아내 길민화 목사와 함께 한국과 몽골을 오가며 선천성 심장병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의 말 한마디에는 50년의 생명 이야기가 녹아 있다.

그는 40여 년간 목회를 이어오며 세 남매를 두었고, 지금은 손자손녀 열한 명이 있다. 한 사람의 생명으로 인해 열아홉 명의 가족이 생겨났다. 그것은 기적이자 은혜였다.

그날의 자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혜가 생명을 낳고, 생명이 다시 은혜를 낳는’ 순환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저도 누군가에게 이런 은혜를 흘려보내며 살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보은의 순간, 모두가 행복했다.

세상은 이런 온기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세상은 결국,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보은의 세월’은 단순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다시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는 삶—그것이 바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의 품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