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독교와 선교] 제주 개신교 정착 및 성장

2025-11-12     고창진 목사
    ▲고창진 목사ⓒ데일리굿뉴스

제주 사회문화에 유입된 개신교의 정착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선교 방안

제주도에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나 도교는 오랫동안 제주 민간신앙과 습합돼 제주 사회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유교 또한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주의 민간신앙과 공존하며 제주 사회문화 질서에 이미 친숙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주인의 의식세계에 스며들고 토착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초기 개신교가 어떻게 제주 사회문화에 유입되고 정착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각각 어떤 선교 방안을 가지고 접근해 왔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제주 개신교의 역사를 3세대로 분류해 ① 제주 개신교의 유입과 정착 그리고 일제강점기까지 ② 8·15해방 이후부터 4·3사건과 한국전쟁 그리고 2000년 이전까지 ③ 20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전 역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주 개신교가 제주 사회문화 가운데 뿌리 내리며 확장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성장 사례는 무엇이며, 부정적인 이미지 요소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본다. 

초기 제주 개신교의 선교방식

제주 개신교 선교를 논하기에 앞서 짚어 봐야 할 중요한 화두가 있다. 제주 사회문화에 대한 개신교 선교의 시작을 이기풍 목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주 지역의 자생적 신앙공동체 모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필자는 제주 사회의 개신교 선교 기점을 이기풍 목사로 보고, 이미 존재했던 신앙공동체의 협력과 역할이 초기 제주 개신교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제주 개신교의 선교 방식은 매우 순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는 여러 신부를 제주도에 파송했지만 개신교는 이기풍 목사를 단독 파송했다. 그리고 제주로 파송된 이기풍 목사가 선교지인 제주 사회문화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기풍 목사의 선교활동으로 대표되는 초기 제주 개신교의 선교적 접근과 방식이 제주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미개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시한 채, 개신교가 믿는 신만이 유일한 신임을 강조하고 개신교 세계관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음을 보게 된다. 

그동안 히브리(구약) 문화에서 헬라(신약) 문화로, 유대인에서 헬라인에게로 넘어가는 성경의 문명사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신학적 관심과 연구가 진행된 것처럼, 이기풍 목사는 제주만의 독특한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제주도와 육지를 동일한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에 다소 보수적이고 원론적인 방법으로만 접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기풍 목사의 신학과 선교의 배경을 통해 좀 더 확실해진다.

그래서 초기 제주 개신교 선교사역은 제주 민간신앙 및 제 주인에게 이미 뿌리내린 불교·유교·도교의 습합과 집약으로 귀결된 제주 토속문화 등과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처럼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개인전도 중심의 선교적 접근과 방식에도 불구하고 이기풍 목사가 선교를 시작한 지 5년 후인 1913년에 이르러서는 제주도에 아홉 개(예배당 3곳, 기도처 6곳)의 교회가 세워졌고, 약 400명의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할 만큼 성장을 했다.

제주도로 유입된 인구와 그들의 정착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제주 개신교는 점차 이를 극복하고 적응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제주 천주교의 성장세를 앞서기도 했다. 이러한 수치는 일제 행정 당국이 작성한 제주도의 종교인구 분포 통계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8년에(일제강점기 제주도 종교인구 분포: 천주교 453명, 개신교 1,346명) 이르러서는 제주 개신교 인구가 천주교 인구보다 약 3배 가까이 성장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비롯해 교세 확장을 하는 데 여러모로 불리한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개신교가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