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칼럼] 술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가족 점퍼를 즐겨 입는 세계적인 기업인’ 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먼저 떠올릴 것 같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통해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인사가 또 있을까 싶다.
특히 젠슨 황이 삼성 이재용, 현대차 정의선 회장과 함께 치킨집을 찾아가 러브샷을 하며 ‘소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객들이 “젠슨 황”을 연호하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음주 문화를 꽤 잘 아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게 됐을지 궁금했다. 고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용산 전자상가를 방문해 촬영한 사진도 공개됐다. 한국 문화에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블랙 핑크 멤버 로제가 부른 ‘아파트’라는 노래를 통해 ‘소맥’과 술 게임 등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터이니, 그리 새로울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근엄하고 과묵하며 은둔하는 듯한 모습만 보이던 국내 재벌 기업 총수가 치킨집에서 ‘소맥’을 들고 러브샷을 하는 장면이 더욱 이채롭게 느껴졌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솔직한 표현일 것 같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음주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공개된 술자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대 대통령 중 윤석열 전 대통령만큼 술에 관한 일화가 많은 인물도 드물 듯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정당에 입당하기 전인 21년 7월 서울 광진구 건대 부근 한 식당에서 당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치맥 회동을 한 사실이 주요 뉴스로 전해졌다. 두 사람의 껄끄러웠던 관계는 술자리로 해소된 것처럼 보였지만 오래 가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술과 관련해 구설에 오르는 일이 잦았다. 23년 3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회담 성과보다 정상 간 폭탄주에 대한 언급이 유독 눈에 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본 맥주와 한국 소주를 함께 마셔보자고 제안해 ‘화합주’, ‘한일 우호주’라고 부르며 두 정상이 폭탄주를 마셨다는 내용이다. 야당은 그 대목을 짚어 “기시다 총리와 폭탄주 말아 마신 것이 외교 성과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폭음은 외신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25년 1월 7일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인사의 증언을 인용해 계엄과 폭탄주의 연관성을 언급했다. “윤 전 대통령이 여당이 대패한 4월 총선 전후부터 회식 자리에서 ‘계엄령’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됐고 스트레스와 음주량도 늘어났다고 한다”라며 안가 등에서 소주와 맥주를 반씩 섞은 소맥을 한 번에 20잔 가까이 마셨다고 보도했다.
윤 전 대통령의 음주 습관은 본인 말로 확인됐다. 11월 3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 사령관을 직접 추궁하면서 두 사람이 회동한 국군의 날 술자리 상황을 스스로 설명했다. “8시 넘어서 오셔갔고 앉자마자 그냥 소주, 맥주 폭탄주 돌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술 많이 먹었죠. 그날?” 곽 전 사령관은 “술은 항상 열에서 스무 잔 그 정도 들었다”고 대답했다. 윤 전 대통령은 “거기서 무슨 시국 이야기할 그런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곽 전 사령관은 “한동훈과 일부 정치인 호명하시면서 잡아 오라 했다. 총으로 쏴서라도 죽이겠다”고 했다며 “비상대권이란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대답했다. 윤 전 대통령은 정국 상황 등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자리가 아니었다는 점을 부각하려 했지만, 음주와 막말 습관이 공개되는 원치 않는 상황이 빚어졌다.
APEC 정상회의가 끝나갈 무렵, 안타까운 음주 사망 사고가 전해했다. 한국 여행을 온 일본인 관광객 모녀가 30대 음주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치여 엄마가 숨지고 딸이 중상을 입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낙산 공원 성곽길을 구경 가던 모녀가 동대문역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인도로 돌진한 승용차에 어처구니없는 변을 당했다.
사고 후 일본 언론은 한국의 관대한 음주 문화를 비판했다. 무엇보다 음주 운전자에 대한 처벌이 가볍다는 점을 지적했다. 음주 사망 사고의 경우 일본은 법정 최고형이 징역 30년이지만 한국은 징역 12년이라는 점을 꼽았다. 가벼운 처벌 탓에 음주 운전 재발률이 높다는 점도 지적했다. 피해자 유가족은 피해 보상 조항이 없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남기기도 했다.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젠슨 황과 국내 두 재벌이 ‘깐부’ 관계를 공언하고, K-팝, k-푸드, K-컬처 등 한류가 전 세계로 더욱 확산할 기세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마저도 용인될 수 있음을 뜻하진 않는다. 양형 과정에서 음주를 이유로 법적 처벌을 줄여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음주 운전에 대한 기준을 높여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
하루키를 읽다 맥주 마시기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술꾼이었던 후배가 매력적인 술을 찾아 즐기는 ‘조주 기능사(바텐더)’로 변신했다. 그는 더 이상 과음하지 않는다. 술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