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바이블] 반 고흐를 좋아하는 이유는?
필자는 반 고흐를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그림 역시 르느와르의 그림과 함께 제일 좋아한다. 이젠 그림을 보면 이름을 보지 않고도 그의 작품임을 파악할 정도다. 필자가 고흐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와 같은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요, 또한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화가로 살다가 ‘자살자’라는 오명을 쓰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필자는 그에게 관심이 많다.
최근 들어 법의학적으로 볼 때 고흐가 자살보다는 타인의 실수나 고의에 의해 피살당했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역시 여러가지 이유로 그 견해를 더 신뢰한다.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는 목사였고, 고흐 역시 어릴 적부터 성경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는 1876년부터 실제로 교사 겸 설교자로 사역을 시작했다. 1878년, 그는 벨기에 보리나주(Borinage) 지역의 가난한 광부들에게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이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고흐는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였다.
광부들과 함께 거친 막사에 살며, 자신의 옷을 나눠주고, 환자들을 돌보며, 거의 금식하듯 살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례비조차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 그분이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계셨듯이, 나도 그곳에 있고 싶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복음 이해였다. 그에게 신앙은 ‘교리’가 아니라 ‘희생’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선교위원회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의 삶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고, 체계적이지 않다”, “그는 설교보다는 감정적이다”, “지나친 열심으로 자신을 망치고 있다”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교단은 그를 “비상식적이고 감정적이며, 신학적으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전도사직을 해임했다. 그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급진적이었으며, 당시 교회 제도 속에서는 ‘불편한 존재’였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여전했지만, 조직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 이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떠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다.” 그는 여전히 복음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그림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술은 신학의 또 다른 형태가 된 셈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반 고흐의 실패는 ‘교회 제도는 감당하지 못한 복음의 급진성’이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처럼 요약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는 설교보다 행동으로 복음을 증언했고, 그의 그림은 여전히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담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인(奇人)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믿고 가르치며, 그 진리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사람들이나 목회자들이 다수에 의해 배척 당하는 시대다.
종교개혁 주간이 지나갔다. 루터가 교황 앞에서 외쳤던 고백을 잊을 수 없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성경의 증거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는 말씀보다 ‘문화’와 ‘유행’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지? 오늘 교인과 목회자는 말씀보다 버려야 할 ‘구습’이나 세속적인 ‘욕망’에 더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반 고흐와 루터의 말씀에 대한 순수성을 존중히 여기고 본받는 개혁이 우리 내부와 한국 교회 내부에서 새롭게 일어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