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 탈제도화 시대의 교회
관습화된 교회 사역들
최근 기존 교회 체제가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논의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 출판돼서 많이 읽히고 있는 「5무 교회가 온다」에서는 기존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해 오던 여러 가지 사역들과 함께 십자가조차도 없애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없앤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전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형식과 제도를 넘어섬으로써 교회를 더 본질에 가깝게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들의 기호와 문화 코드를 감안해서 어떻게 이들과 접촉할까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얼마 전에 한 중형교회에 부임한 담임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교인 몇 분이 찾아와서 요즘 교인들이 교회학교 교사를 안 하려고 하고, 성가대를 안 서려고 하고, 주일 중식 봉사를 안 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담임 목사는, 그럼 다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교회를 어떻게 하려고 하시냐고 물었다고 한다. 목사는 그 사역들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고 동의하면 참여자나 봉사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의무감에서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작은 교회에서는 날마다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교인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다. 교인들이 모두 교회에서 멀리 살기 때문에 새벽예배에 참석하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교회에서 새벽예배는 드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는 사모와 함께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에 예배당이 아니라 교회 식당 마주 앉아서 큐티 나눔식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예배와 사역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한국교회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습관적으로 드리던 예배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됐으며, 그래서 코로나 사태는 이제까지 이루지 못했던 개혁을 감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팬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된 후, 한국교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새롭게 개혁되기보다는 빠르게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분위기다.
교회 제도화의 딜레마
이러한 시점에서 교회의 본질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됐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신자들 사이에 일치와 연합, 결속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조직으로서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어그러짐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존재를 지속하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기 위해서 제도화는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공동체성을 상실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교회 제도화의 딜레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교회 유형과 관련해 교회형(church type)과 종파형(sect type)으로 나눠 설명하기도 한다.
베버와 트뢸치는 종교가 초기에는 종교 정신의 순수성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충성을 다하며 세상과의 구별을 강조하지만 점차 기존의 정치 및 사회 체제와 타협하게 되고 그것에 순응하게 되면서 종파형이 교회형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종파에는 대개 사회의 하류층이나 주변부 인물들, 박탈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여하며 공동체성을 경험한다. 반면에, 교회에는 주로 사회의 주류 계층이 가입하면서 교회 자체가 기득권층화 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에는 세상과의 구별을 강조하지만 점차 기존 체제와 차이는 옅어지게 되고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제도로 굳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교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기독교는 일종의 신흥 종파였지만, 국교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고 점차 제도화되면서 기성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또한 개신교는 가톨릭의 지배 아래서 하나의 신흥 종파로 시작했지만,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 나왔지만, 성공회가 제도화되면서 성공회 성직자인 웨슬리는 감리교를 창시했다.
그러나 감리교 역시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자 구세군을 창설했다. 이와 같이 종파형은 역사의 진전에 따라 점차 교회형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탈제도적이지만 본질적인 교회
신학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으나, 그 결과 교회가 생겨났다”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였는데 역사적 발전 속에서 예수 운동이 제도적 형태인 ‘교회’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복음이 종교적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며 변질됐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나온 ‘리퀴드 처치, 솔리드 처치’는 오늘날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러한 제도화의 딜레마에 천착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회를 한 번에 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고정된 관점으로 바라보는 집회 중심의 관점보다는 관계와 소통의 연속체로 보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회 생활의 방식은 초기 형태에서 점차 발전하면서 현대 문화의 고체와 같은 딱딱한 특징들을 모방해왔다. 저자는 이런 특징의 교회를 ‘솔리드 처치’라고 부른다. 이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의 저서인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에서 근대를 고체 또는 딱딱한 근대와 유연한 근대로 구분한 것과 관련된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근대적 시스템은 한계를 드러내고 오늘날의 근대성은 조금씩 유연화 과정을 거치면서 액체화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솔리드 처치의 특징은 예배의 외형에 집중한다. 예배 참석 인원을 중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예배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 목회자들은 각자의 사역에 집중하기보다 서로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교회에서도 관료주의가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의 참모습을 탐구하며 리퀴드 처치를 주창한다. 리퀴드 처치가 필요한 이유는 기존의 교회 형식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제기된 영적인 갈망과 필요를 채워주는데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교회에 참석하지 않거나 결코 교회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접촉면을 넓힐까 하는 문제와 이어진다. 그래서 저자는 역동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관계에 기초한 교회를 강조한다.
리퀴드 처치는 요즘 이야기되는 플랫폼 처치와도 일맥상통한다. 특정 공간에 한정되거나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교회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며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뉴노멀 교회는 시간과 장소, 대면과 비대면을 뛰어넘는 교회이고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교회다.
중요한 것은 제도나 형태가 아니라 교회가 본래의 존재 목적에 충실하면서 본질 사역에 주력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도와 관행에 갇힐 것이 아니라 본래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존재 목적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