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박채은 양은 그룹 방탄소년단(BTS) 팬인 아미다. 평소 SNS에서 아미들과 맞팔하던 박 양은 최근 씨피(couple · 팬이 그룹 중 지지하는 멤버 커플) 팬들과 자주 소통하게 됐다. 대화 주제는 대부분 팬픽이었는데, 내용을 모르면 소외될 정도였다. 박 양은 분위기에 휩쓸려 트위터 알페스(Real Person Slash·실존 남성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동성애)를 읽게 됐고, 음란물을 연상케 하는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박 양은 이후 팬픽을 보지 않지만, BTS가 나올 때마다 팬픽 장면이 떠오른다.
 
 ▲아이돌 팬들이 오랫동안 음지 문화로 향유하던 ‘팬픽’이 최근 활성화하면서, 일부 팬픽에서 다루는 왜곡된 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가수 홀랜드의 'Neverland(네버랜드)' 뮤직비디오 장면(왼쪽)과 동성애 팬픽이 많이 올라오는 것으로 알려진 사이트 포스타입 화면.(사진제공=홀랜드 'Neverland(네버랜드)' 뮤직비디오, 포스타입 갈무리)

음지 문화에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세계적 보이 그룹 BTS 멤버들이 낯뜨거운 베드신의 주인공이 됐다. 멤버들이 주고 받는 노골적인 성적 표현은 민망할 정도다. 팬들이 직접 쓴 소설, 팬픽의 이야기다.

팬픽은 팬(fan)과 소설을 뜻하는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팬들이 창작하는 소설을 의미한다. 팬픽의 역사는 꽤 길다. 처음엔 대부분 팬심에서 시작된 로맨스나 판타지 충족이었다.

본격적인 등장은 1990년대로 볼 수 있다. HOT와 젝스키스, 신화 등 1세대 아이돌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팬덤이 형성됐다. 당시 팬 동호회에는 아이돌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등장했고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생긴 신조어가 '팬픽'이다.

팬픽은 아이돌 세대의 교체와 팬덤의 진화를 거쳐 분화를 거듭했다. 특히 2000년 초반 인터넷 소설의 황금기에 이어 최근 몇 년 새 웹소설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팬픽 역시 전환기를 맞았다.

우선 팬픽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연령층이 넓어졌다. 장르도 다양하고 작품의 질적 수준 역시 높아졌다. 몇몇 팬픽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출판되거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분화 거듭할수록 확산하는 우려

팬픽 소비가 확산하면서 우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선정적인 동성애다.

실제로 많은 팬픽이 아이돌 멤버 간 동성애를 다루고 있었다. 이 중 대부분이 동성 간 성관계를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했다. 강제로 성을 착취하거나 대가성 성관계 등을 사랑으로 미화한 설정도 버젓이 유통되고 있었다.

수위가 높은 팬픽은 팬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이다.

대학교 1학년 황세경 씨(19 · 여)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때 팬픽에서 강간하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그는 자신과 다르게 많은 친구가 트위터 알페스를 보며 좋아했다고 밝혔다.

황 씨는 "평범한 연애가 아니었다"며 "이야기가 전개되기 위한 전제로 항상 성적인 요소(동성애 행위)가 포함됐는데도 친구들은 좋아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처럼 10대 소녀들이 주로 팬픽을 향유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청소년에게 왜곡된 성적 환상과 그릇된 성 의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적은 2013년 실시한 한 조사가 방증한다.

서울시와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가 서울 지역 중학생 1,078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111명(10.6%)이 '동성 친구에게 (이성에게 그렇듯) 설렌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중 여학생(12.5%)은 남학생(8.6%)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 정체성을 고민했다는 응답자도 여학생(7.4%)이 남학생(4.3%)보다 많았다.

특히 당시 조사에서 중학생 1,053명 중 751명(71.3%)이 성 표현물을 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중 여학생(540명)은 팬픽과 야오이(19%), 소설(18.5%)을 자주 접한다고 답했다. 야오이는 남성 간 동성애를 다루는 소설이나 만화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팬픽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동성애 등으로 전개되는 방향에 대해서는 우려하고 있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이 팬픽의 왜곡된 메시지에 대해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은 "자녀들이 향유하는 팬픽, 그 속에 다뤄지는 동성애 등은 부모들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자녀들에게 건강한 성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관심과 교육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팬픽 문화의 무분별한 발전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단순 오락물이더라도 동성애를 다룬 팬픽을 계속 생산하고 소비하게 되다 보면 성의 왜곡된 의식이나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청소년들이 선정적인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문제점을 언론이 계속 지적하고 계도 활동을 해야 한다"며 "학교에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교육이 이루어져서 학생들이 스스로 이러한 문화를 자제하게끔 유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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