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우물부터 피렌체의 광장까지…비공식적 공공생활로 누리는 즐거움
사회 성장시키고 발전하는데 주춧돌…제3의 장소 복원해야 공동체 회복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 가까이 살면서 사촌 형제나 다를 바 없이 정이 든 이웃을 의미하는 말로, 한국에서 유효한 개념이다. 이뿐 아니다. 한국처럼 '우리'라는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드물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공동체를 중시하는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이어왔다. 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동체에서 일탈해 개인화하는 흐름이 급속화되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편적인 소통 관계가 늘면서, 대면접촉 장애라는 새로운 부작용을 양산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공동체 상실과 고독감 같은 문제의 원인을 '장소'에서 찾는 움직임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수많은 노천카페는 파리를 파리답게 만들고, 피렌체의 정신은 북적이는 광장에서 나온다. 과거 한국의 빨래터는 아낙네들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소통의 장(場)이었다.ⓒ데일리굿뉴스
  
'제3의 장소'의 쇠퇴…황폐해진 현대인의 삶
 
"새로운 세대는 공동체 생활보다는 고도로 개인화된 삶을 추구하며 공익보다 개인적인 성공을 중요하게 여긴다. … (중략) … 주택단지에서는 거의 모든 공간이 개별 가족들을 위해 계획되었다. 따라서 집 밖에서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쌓아보려고 해도 근대적 교외 주거단지의 제한된 특징과 시설에 가로막혀 좌절하게 된다." _ '제3의 장소' 49쪽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이른바 ‘제3의 장소’는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사람들은 그동안 제3의 장소에서의 비공식적 공공생활을 통해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거나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등 일상의 기쁨을 누리곤 했다. 그러는 사이 제3의 장소는 소문과 소식의 근원지가 됐고, 때론 역사적 사건을 촉발하는 거대한 정치적 장(場)이 되어 공격을 받았다.
 
과거 우리사회에도 제3의 장소가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우물이나 빨래터, 길쌈방 등은 아낙네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소통의 장이었다. 서민들이 찾던 주막도 주점·여관뿐 아니라, 조선팔도에서 온 소식과 문물을 교류하는 기능을 겸비한 서민들의 제3의 장소였다. 그런가 하면 기방은 단순히 술과 유흥을 즐기는 장소이기 전에, 비공식적인 정치 중심지로 알려졌다.
 
제3의 장소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도시마다 존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공식적 공공생활을 통해 소통과 교류를 나누고 정보를 생산해왔다. 이러한 제3의 장소의 기능은 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위대한 문명으로 진화시키는데 주춧돌이 됐다.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경관의 일부가 되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지배하기도 했다.

 
 ▲제3의 장소|레이 올든버그 지음|김보영 옮김|풀빛|464쪽|2만 6,000원 (사진제공=풀빛)

"수많은 노천카페는 파리를 파리답게 만들고, 로마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포럼이 먼저 떠오른다. 런던의 정신은 펍에서, 피렌체의 정신은 북적이는 광장에서 나온다. 비엔나를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링슈트라세에 있는 오래된 커피하우스에 가야 한다. 아일랜드에는 식료품점에서 변모한 펍이 있고, 독일에는 전통적인 비어가르텐이 있으며 일본에서는 다실에서의 다도가 전반적인 생활양식의 모델이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 교수는 저서 '제3의 장소'(The Great Good Place)에서 파리의 노천카페나 로마의 포럼 등 각 도시의 제3의 장소가 시민과 사회 사이에 기초적인 매개를 이뤘으며, 지역사회를 구축하는 기능을 했다고 밝힌다. 특히 올든버그 교수는 이와 같은 장소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시민 참여의 기반이 된다는 점을 설명하며, 공동체라는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제3의 장소가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사생활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과 개인화된 사회적 흐름 속에 도시계획마저 획일화·대형화를 추구하게 됐기 때문이다. 현대의 도시계획은 공공시설 축소와 작은 가게 및 공동체 상실 등을 초래했고, 결국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노인과 아이 등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가 없어졌고, 오히려 계층 간 갈등은 심해졌다.
 
올든버그 교수는 가정이라는 '제1의 장소'와 직장이나 학교라는 '제2의 장소'만을 이어가는 현대인의 삶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고찰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지역공동체가 없어서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려다 보니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 과하게 의존하게 된다"며 "이러한 중압이 가져오는 결과는 확연하다. 가족의 해체와 악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중산층 가족의 수준은 1960년대 저소득층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올든버그 교수는 "지금처럼만 살라는 법은 없다"며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현대인들이 '편리함'이나 '효율'이라고 생각했던 가치를 왜곡하진 않았는지 돌아볼 것을 조언하며,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제3의 장소'가 복원될 때 공동체를 되살릴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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