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동성애는 이미 문화를 통해 대중과 아주 가까이 마주하고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청소년이 즐겨 보는 순정만화까지. 미화된 동성애는 대중의 눈과 마음을 가렸고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동성애는 낭만적인 '사랑', 차별과 억압의 상징 '인권'으로 대중 속에 잠식됐다.
 
 ▲최근 동성애가 대중문화를 통해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가랑비에 옷이 젖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비주류에서 주류가 되기까지
 

"연민이라 해도 좋고…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들 혐오하는 동성애라도 좋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너에 대한 나의 이 느낌뿐이야…"_만화 '호텔 아프리카' 중에서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는 1995~1998년까지 연재된 순정만화다. 미혼모, 흑인, 혼혈아, 인디언, 집시, 히피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나갔다. 작가는 당시 주류문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소재들을 다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다.
 
만화에서 주인공 엘비스만큼 독자의 사랑은 받은 캐릭터 에드. 그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아픔이 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다. 에드는 과거 고등학교 후배 이안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두고 심한 내적갈등을 겪지만, 결국 커밍아웃한다.
 
'풀하우스'로 잘 알려진 원수연의 ‘LET 다이’(1996)는 10대 남학생 제희와 다이의 동성애를 다룬 만화다. 특히 만화는 동성애뿐 아니라 성폭력, 학교폭력, 자살 등 충격적인 소재와 미성년자들의 범죄를 자극적으로 묘사해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두 작품 모두 연재 당시 두꺼운 팬층을 양산했다. 지금도 만화를 회자하는 충성 높은 마니아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엔 매력적인 캐릭터가 한몫했다. 에드와 다이는 소위 '꽃 미모'를 가졌지만, 상처와 공허가 가득한 인물이다.
 
독자들은 이들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주인공의 낭만적인 사랑앓이에 가슴 아파했고, 설령 그 사랑이 동성애라고 해도 '해피엔딩'이 되길 응원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동성애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고, 동성 간의 사랑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1990년대에는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화가 꾸준히 대중이라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동성애에 대해 거부감이 컸고, 동성애를 다룬 작품은 비주류로 평가받았다. 

"가랑비에 옷 젖었다"…대중의 인식 깨지다
 
2000년대 들어서 사회의 흐름이 빠르게 변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혐오에서 인권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 2000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총 10개국에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한국사회의 분위기도 이전과 달라졌다.
 
그러는 사이 대중문화는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는 동성애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간접적인 장치를 활용하면서 대중의 거부감을 조금씩 허물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장여자, 여장남자 등이다.
 
이병헌, 이은주 주연의 <번지 점프를 하다>(2001)를 비롯해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킨 이준기, 감우성 주연의 영화 <왕의 남자>(2005) 등이 대표작이다. 두 영화는 각각 환생과 여장남자 등의 장치를 두어 관객들이 동성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도왔다.
 
영화뿐만 아니다. 2007~2010년에는 남장여자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한꺼번에 안방극장을 찾았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 <미남이시네요>(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 방송되는 작품마다 열풍을 일으키면서 한동안 여성들의 커트 머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동성애는 더 깊숙이 대중들을 찾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는 여성 간의 육체적 관계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대중이 느낀 거부감은 크지 않았다. 현재 개봉 중인 김희애 주연의 <윤희에게>(2019)는 작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좌석 판매율이 <겨울왕국2>를 넘어설 정도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도 예외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남자 왕자가 남자 백조와 사랑에 빠지는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전체 관람가인 이 작품은 관객들의 극찬과 함께 공연마다 매진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다.
 
특히 전 세계에 'Let It Go' 열풍을 일으켰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은 주인공 엘사의 레즈비언 루머가 퍼지며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에 당시 어린 자녀를 둔 일부 학부모 중에서는 "혹 친 동성애 메시지가 숨겨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관념과 현실 사이 차이 인식시켜야
 
전문가들은 "소프트파워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문화'라는 가랑비에 '대중'이라는 옷이 젖었다는 것.
 
영화평론가 박태식 성공회대 교수는 "예술은 사회보다 전위적으로 앞서왔다. 동성애 역시 오랜 시간 많은 작품으로 다뤄지는 가운데 대중의 거부감이 사라지고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가 성(性)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에 대한 우려도 잇따랐다. 필름포럼 대표 성현 목사의 목소리다.

성 목사는 "대중문화가 다루는 '성'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희석·왜곡·미화’ 3가지 방식으로 일관된다"며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관념적으로 향유할 때는 아주 세련되거나 멋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겪었을 때의 문제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조폭이나 폭력물 등을 예로 들었다. 이런 폭력물들이 희석·왜곡·미화라는 방식을 통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폭력도 충분히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 하지만 일상에서 실제로 폭력을 마주하게 되면 상황은 다르다.
 
성 목사는 대중의 관념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인식시켜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즘(ism, 주의) 보다 실존적인 부분들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훼손하고 깨트리는지 구체적인 데이터로 접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말씀을 인용했다.
 
계속해서 그는 "동시에 우리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로 비치기 보다는 건강한 가족, 건강한 성 등 포지티브(positive)한 모습들을 더 많이 발굴해 세미나, 문화 등을 통해 더 보여주는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