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관련 법률 변화가 예고된 이탈리아.(사진제공=연합뉴스)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돕는 일이 항상 범죄는 아니다."

바티칸 교황청을 품은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안락사를 인정하는 판단을 내렸다. 이탈리아는 국민의 90%가 로마 가톨릭인 보수 국가다.

이탈리아 헌재는 지난 25(현지시간)일 "생명유지 조치로 삶을 지탱하고 있으나 되돌릴 수 없는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가 스스로 삶을 끊으려 할 경우 이를 실현하게 한 누군가에 대해 특정 조건에서는 처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또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한 사람의 헌법적 권리라고 명시했다. '안락사'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안락사의 법적 허용의 길을 열어놓은 것으로 풀이 된다.

이번 결정은 이탈리아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로 'DJ 파보'로 알려진 파비아노 안토니아니가 외국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여행과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던 안토니아니는 2014년 교통 사고로 사지가 마비되고 시력까지 상실했다.

삶을 지속할 의지를 잃은 안토니아니는 2017년 2월 급진당 당원인 마르코 카파토의 도움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로 건너가 죽음을 택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안토니아니의 선택을 도운 카파토는 이탈리아에 돌아와 법정에 서게 됐다. 통상적으로 이탈리아에서 극단적 행위를 돕거나 조장할 경우 최소 5년에서 최장 12년의 징역에 처해진다.

밀라노 법원은 당시 조력자살 혐의로 카파토에 대한 심리를 시작하는 한편 헌재에 안락사 관련 처벌 규정을 담은 형법 580조의 '합헌성'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해 헌재의 판단에 줄곧 이목이 쏠렸었다. 

헌재의 이번 판단으로 카파토는 밀라노 법원에서 진행될 재판에서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카파토에 대해 무죄가 선고될 경우 이탈리아에서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첨예해질 것으로 보인다.

헌재 결정에 따라 이탈리아 의회도 이제는 이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헌재가 안락사를 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리면서 의회 차원의 후속 논의가 불가피하게 된 것.

헌재 결정에 대해 정치권에선 이념 성향에 따라 환영과 반대가 엇갈렸다.

최근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과 새 연립정부를 꾸린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은 의회가 헌재 결정을 따라야 한다며 환영했다. 반면 극우 정당 동맹을 비롯한 우파 성향의 정당들은 헌재 결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는 "나는 여전히 안락사에 반대한다"며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환영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를 부정하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하늘이 내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안락사를 부정해온 가톨릭계는 헌재 결정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헌재가 인간 생명에 대한 실용주의적 시각에 굴복했다'는 성토도 나온다.

이탈리아주교회의(IEC) 역시 불만을 표시하고 헌재 결정에 거리를 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일 조력자살이나 안락사에 분명한 반대를 표명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의사협회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죽고 싶다는 병든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고자 의약품 사용을 법적으로 허용하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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