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후, 한국 사회는 여성을 이분법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 인권 신장과 성 평등을 외치던 페미니즘이 일부 과도한 행보로 변질되면서, 한국 사회엔 페미니즘 대 반(反)페미니즘이라는 커다란 갈등 구도까지 형성됐다. 그러는 사이 여성 문제는 정체성이 훼손되며 본질과 점점 동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본질을 바라봐야 할 때다. 사회구성원인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여성 문제의 시작이라는 걸 말이다. 
 
한국 여성 10명 중 6명이 우리 사회의 가장 불안한 요인으로 ‘범죄 발생’을 꼽았다. 사진은 최근 서울 여의도 여의나루역 앞에서 '대학 내 권력형 성범죄 해결을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사진제공=연합뉴스)

안전하다, 안심하지 마라

최근 유튜브에 한 CCTV 영상이 올라와 논란이 불거졌다. '신림동 소름 돋는 도둑 CCTV 실제상황'이란 제목의 영상에는 기괴한 삐에로 가면을 쓴 남성의 미심쩍은 행동이 촬영됐다. 남성은 원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들더니, 현관에 귀를 기울이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등 침입을 시도하다 택배 상자만 훔쳐 돌아갔다.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급속히 퍼지면서 시민들은 또 한 번 불안에 떨었다. 특히 신림동에 혼자 거주하는 여성들의 체감은 상상 이상의 공포였다. 지난 5월 원룸에 귀가하는 여성을 뒤쫓아 가 집에 침입하려 한 이른바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공포는 얼마 못 가 분노로 변했다. 알고 보니 '신림동 삐에로 도둑'이 회사 홍보를 위해 연출된 자작극으로 확인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영상을 올린 게시자는 같은 원룸에 거주하는 최 씨(34)였다. 그는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으로 여성들의 불안감이 커진 상황을 노려 자신이 운영하는 택배 보관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이 같은 공포 마케팅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성들이 느낀 공포는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주거침입 성범죄는 매년 300건 이상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2017년 기준 성폭력이 일어난 장소로 '주거지(16.1%)'가 가장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공간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 피해를 보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떤가. 사회구성원인 여성에게 사회는 또 다른 보호 울타리가 되어 주었을까. 故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은 전 세계 곳곳 참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로 답을 던지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건 1년 뒤, 한 여론조사 기관은 인도 여성들의 90퍼센트가 델리의 거리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는 갈수록 늘고 있다. 조티 싱 강간·살인 사건 이후 촉발된 분노와 각종 약속들이 잊히고, 델리는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여자 전쟁> 299p
 
2012년 발생한 '조티 싱 강간·살인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사건 후 인도는 '강간의 왕국'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물론 꼬리표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인도는 오래전부터 조혼을 비롯해 여아 영유아 살해, 강간 등 무자비한 여성 탄압이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용인돼왔다.
 
의대생 조티 싱(23)이 집단강간을 당한 뒤 사망한 일을 계기로 인도 사회는 분노에 휩싸였다. 여성 문제, 게다가 성폭행 사건으로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인도 정부도 심각성을 인지한 듯 여성이 안전한 나라를 표방하는 듯 보였다. 7년이 지났다. 인도에서는 13분 30초에 한번꼴로 성폭행이 발생하고 있다. 그중엔 7개월 난 영아도 있었다.
 
인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에선 여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중엔 물론이고 민주화를 외치는 광장에서, 가톨릭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나는 곳곳에서 일어난다고 <여자 전쟁>은 밝힌다. 평범한 일상도 예외는 아니다. 학교, 직장, 집 등 안전하다 믿었던 장소는 언제고 성범죄 장소로 바뀔지 모른다.

 
 ▲수 로이드 로버츠 지음 / 심수미 옮김 / 클 / 408쪽 / 2만 원 ⓒ데일리굿뉴스
안전한 사회를 꿈꾸며
 
한국 사회도 여성 성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여성들은 우리 사회 가장 불안한 요인으로 '범죄 발생'을 꼽았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이달 초 발표한 '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성의 범죄 발생에 대한 불안은 57%,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2017년 2만 9,272명에 달했다. 
 
'신림동 강간 미수 사건'이 발생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뉴스에선 여성의 집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하려 한 범죄가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어김없이 여성에 대한 프레임은 '약자'와 '페미니스트'라는 이분법으로 나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약자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본질은 사회구성원인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을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여자 전쟁>은 의미가 있다. 책 속에 담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워 폐부를 찌른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은 위안과 용기, 그리고 작은 희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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