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서울 곳곳에서 펄럭이던 수많은 태극기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일에는 대대적인 행사들이 열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이에 본지는 3·1운동 기념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취지에서 수도권과 주요 지방의 3·1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인천 창영초등학교에는 인천보통공립학교 당시 사용하던 구 교사가 보존되어 있다.ⓒ데일리굿뉴스

대한민국 관문이자 동북아시아의 허브. 인천이 갖는 지리적 이점은 산업 및 국제도시로서의 번영을 안겼다.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은 대표적 개항도시로 국제간 교류가 활발했다. 근대도시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 일본인을 비롯해 중국인 등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됐다.

하지만 동시에 당시 수도 경성으로 가는 관문이자 한반도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인천은 열강들의 착취와 일제 식민 지배 영향이 절대적인 곳이었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천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대규모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여느 지역 못지않게 뜨거웠고, 한성임시정부 태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창영초등학교 내에 세워진 '3·1독립만세운동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데일리굿뉴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함성
 
인천 동구 이른바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배다리를 걷다 보면 얼마 못 가 오래된 학교가 눈에 띈다. 인천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창영초등학교(과거 인천공립보통학교)다. 학교에 들어서자 운동장 뒤로 붉은 벽돌의 구 교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 교사는 건립 당시의 초기 근대 건축양식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었다.

구 교사를 바라보니 100년 전 학생들이 교사를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1919년 3월 6일 그날의 현장을 구 교사 앞에 세워진 '3·1독립만세운동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가 전해준다.
 
인천공립보통학교 고학년 학생들은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나흘 동안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감행했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 동참을 종용했다. 김명진과 이만용 등 일부 주동 학생들은 학교와 경찰서 간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부숴 옥고를 치렀다.
 
 ▲인천시 계양구에 남아있는 황어장터 터에는 '황어장터3·1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데일리굿뉴스
 
인천 3.1운동의 도화선, 황어장터3·1만세운동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천 각처로 소소하게 번진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24일 장시를 이용한 군중집회를 통해 처음으로 큰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인천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인 황어장터3·1만세운동이다.
 
황어장터3·1만세운동은 인천에서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다. 약 1,000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어장터 터는 인천 계양구의 조용한 주택가 가운데 위치했다. 2004년 개관한 황어장터3·1만세운동기념관과 우뚝한 기념비가 역사적인 장소임을 증명했다.
 
기념관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황어장터라는 명칭은 황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된 데서 유래됐다. 또 황어장터에서는 소를 거래하는 우시장이 열렸는데, 당시 장터와 우시장이 같이 열리는 곳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장은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로 늘 성황이었다.
 
관계자는 "많은 인파가 황어장터에 자연스럽게 집결될 수 있었다"며 "이 가운데 이은선 지사가 일본 순사의 칼에 순국하고, 황어장터3·1운동의 주역인 심혁성 지사를 비롯해 이담, 임성춘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다"고 설명했다.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은 조선 13도 대표자들이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근간인 한성정부 수립을 결의한 역사적인 장소다. 그러나 현재 자유공원에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데일리굿뉴스
 
인천 3·1운동…임시정부 태동하다
 
황어장터3·1운동은 인천 전 지역에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인천의 3·1운동은 문학동, 용유면, 월미도 등지로 퍼졌다. 그리고 1919년 4월 11일 인천의 심장부인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임시정부 탄생을 위한 역사적 태동이 됐다. 
 
1888년 만들어진 만국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전국 13도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의 의지를 다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근간인 한성정부 수립을 결의한 이곳은 현재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인천 시민의 휴식처가 됐다.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로 유명하다. 자유공원의 상징 맥아더 장군 동상엔 적지 않은 관광객이 모여 있었다.
 
이에 반해 13도 대표자들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주변 상인들에게 물어 찾은 공원 가녘에는 '한성임시정부 13도 대표자회의 집결지'라고 새겨진 작은 기념비가 아무도 찾지 않는 역사적 장소를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 후 귀국하여 가장 먼저 인천을 찾았다. 두 번의 수감생활 동안 아낌없이 도와준 인천 시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의 현장을 잊지 않고 기억한 김구 선생의 메시지는 과거를 잊어버린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해방 후 첫 번째 길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인생에 뜻깊은 곳이다."- <백범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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