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흥은 십자가 복음의 유업이다. 그것은 교회 역사만 보아도 뚜렷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얼마 전에 살펴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하나님의 부흥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이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만큼 부흥이 가깝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부흥은 항상 영적으로 극심하게 침체된 상황에서 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하여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항상 그렇게 하셨다.
 ▲여주봉 목사 ⓒ데일리굿뉴스

나는 개인적으로 18세기 요한 웨슬리나 조지 휫필드를 통한 부흥이 오기 전의 영국 상황을 보면 오늘날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기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웨슬리 듀엘의 『세계를 바꾼 부흥의 불길』은 요한 웨슬리 시대 하나님의 부흥이 오기 전 영국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좀 길지만 같이 읽어보자.

18세기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암흑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몹시 소란했던 시기였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사회적인 필요가 많았던 시기였다. 잉글랜드에서는 자연신론의 치명적인 영향으로 성경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영적인 무관심과 회의론이 팽배해지고 자유가 방종으로 치닫게 되었다. 종교는 그 영성과 능력을 상실했으며 기껏해야 윤리정도로 생각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의해 변화를 받지 못했다. 경건하고 신실한 목회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많은 성직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 실정이었다. 아니 그들은 오히려 그 도리를 반대하는, 명목상의 우두머리들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음주벽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는 부흥사들을 대적하며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의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비웃었다. 대부분의 유명한 정치가들은 불신자들이었으며 그 생활이 부도덕하고 음주벽이 있으며 사악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결혼을 우습게 여겼다. 체스터필드 경이 그 아들에게 쓴 유명한 편지를 보면 어떻게 하면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적혀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던 많은 성직자들은 그들이 시무하는 교회 근처에는 살지도 않았다. 그들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았지만 그 중에는 자기 교구민을 전혀 돌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주교는 자기 교구민을 오직 한 번 보았을 뿐이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는데 그의 집은 호숫가에 있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점점 줄어들고 교회 건물은 아주 황폐해져 갔으며 사람들은 예배를 등한시했다. 하원의원 중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네다섯 명에 불과했다. 볼링부록 경은 성직자들의 생활양식을 보고 그들을 비난하며 “기독교가 당신들처럼 엉터리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맡겨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생존해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 잉글랜드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던 소시민들은 무지하고 놀랄 만큼 잔인했다. 거기에는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만 있었다. 경찰이라든가 어떤 공공 세력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런던의 버밍엄에서는 폭도들이 집을 불사르고 개방 감옥을 돌파하는 등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범법자들은 점점 대담하게 서민들을 위협했다. 런던에 있는 집들 중 세 집 건너 한 집은 술집이었으며 “일 전만 내고 술을 마시라. 이 전만 내면 술을 실컷 마실 수 있으며 술이 깰 때까지 누워 있을 지푸라기까지 마련되어 있다” 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런던에서는 무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 외에는 날이 어두워진 후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가까운 교외조차 가지 않았다. 해변가에 있는 지역에는 밀수업자들이 횡행했는데 무장한 무리들이 그 밀수입된 상품을 런던으로 가져왔다. 당시에는 스포츠마저 잔인해서 투계라든가 투우, 곰 놀리기(메어 놓은 곰에게 개를 덤비게 하는 경기), 포악한 불독끼리 싸움 붙이기 등이 성행했다.

당시 경찰력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지만 범법행위에 대한 재판만은 상당한 무자비한 편이었다. “사형에 처하되 죽기 전에 성직자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언도를 받은 것이 적어도 160건이 되었는데 이것은 즉각적인 사형집행을 의미했다. 1800년도까지는 벚나무를 베어 넘어뜨린 사람, 어떤 사람의 손에서 무엇을 낚아채어 달아난 사람, 어느 집에서 40실링 내지 그 이상을 훔친 사람, 어느 배에서 5실링에 해당하는 물건을 훔친 사람 등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사형을 언도 받았다. 법정 기록을 보면 한번에, 즉 재판이 열린 한 회기 중에 무려 40명 내지 50명의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감옥들마다 죄수들이 꽉꽉 들어찼으며 그 안은 몹시 어둡고 더러웠다. 게다가 감방들을 통해 흐르는 하수구로부터 악취가 스며 나와 냄새마저 고약했다. 침대는 물론 없었고 물도 충분치 못했으며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마저 한 사람 당 하루 2페니 정도의 빵이 고작이었다. 많은 죄수들이 어둡고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갔다. 웨슬리와 그 일행은 부흥이 일던 초창기에 바로 이런 감옥들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역사학자들 저도 웨슬리를 통한 각성 운동이 없었더라면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와 같은 유혈 혁명이 일어나서 그 나라가 100년은 후퇴했을 텐데 그러한 영국을 구한 것이 요한 웨슬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부흥이 그 시대 영국을 구했다.  

당연히 부흥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부흥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의 유업이다. 그리고 부흥이 올 때마다 그 예비단계에서 십자가의 복음의 진수가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 힘을 내어 교회를 십자가의 복음 위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게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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