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얼굴은 조선사람 같아 선조는 조선인이겠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본 적도 없는 조선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그 청명한 푸르름이 펼쳐진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 '얼굴' 중에서
 

한국을 사랑한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데일리굿뉴스, 봄날의책 제공
시대를 성찰한 지성인, 한국을 사랑한 일본 대표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의 대표작을 모은 시선집 <처음 가는 마을>이 출간됐다. 시선집에는 그의 9권의 시집과 3권의 시선집, 미발표작 등 52편의 시편이 실려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와 태평양전쟁으로 살벌한 시대를 버티며 성장했다. "이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그의 시와 사상은 시대의 아픔과 나라가 저지른 만행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가게 하는 일, 이것이 이바라기 노리코가 평생 쉬지 않고 해온 작업이다.
 
이번 시선집에는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빛나는, 청춘의 시절, 자유와 희망이 가득한 곳, 그 속의 사람들을 꿈꾼' 시인의 마음이 ‘잔잔하되 절실하고 절절히’ 표현된 시편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한국을 사랑하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죄의식과 부끄러움, 그리고 한글과 한국 예술에 대한 애정은 그의 시편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일찍이 일본어가 밀어내려 했던 이웃나라 말 / 한글 / ゆるして下さい (유루시테구다사이) / 용서하십시오 / 땀 뻘뻘 흘리며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 / 어느 나라 언어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 굳건한 알타이어족의 한 줄기 정수에- /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 온갖 애를 써가며 /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 '이웃나라 언어의 숲' 중에서
 
실제로 시인은 어린 시절 김소운이 편역한 <조선민요선>을 읽고 민요의 소박함과 기지에 이끌린 후 불상, 민화 등 조선의 미술에 애정을 갖게 됐다. 남편과 사별한 이듬해인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윤동주와 신경림 등의 작품을 읽으며 한국의 현대시를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바라기 노리코가 번역하여 출간한 <한국현대시선>은 그에게 1991년 요미우리문학상(번역부문)의 수상의 영광을 안기기도 했다. 또한 그가 번역한 윤동주의 시가 일본의 한 교과서에 실리며 일본 사회에 윤동주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젊은 시인 윤동주 /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 그대들에게는 광복절 / 우리에게는 항복절인 / 8월 15일이 오기 겨우 반년 전 일이라니 / 아직 교복 차림으로 / 순결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 '이웃나라 언어의 숲' 중에서
 
<처음 가는 마을>을 번역한 정수윤 씨는 "지난 세기,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 섬에서 뜨거운 생을 살다간 시인은 자기 나름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 아름다운 투쟁의 시간을 살다갔다"며 "무엇이든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수용하여 자기 언어로 풀어내고자 하는 시원스러운 용기, 모든 감정을 안고서 용감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경쾌하고 성숙한 시인의 시편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일본의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동화작가, 각본가이다. 1926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전쟁 중 공습을 피해 다니다 패전 후 희곡을 쓰기로 결심한다. 1953년 다니카와 슌타로 등 작품 성향이 비슷한 시인들과 시 동인지 <노(櫂)>를 창간, 1955년 첫 시집 <대화>를 발표했다. '6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 대표작으로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총 9권의 시집을 남겼다. 1976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한글 에세이 <한글로의 여행>을 썼고, 1991년 번역시집 <한국현대시선>으로 요미우리문학상(번역부문)을 수상해 한국시를 일본에 알렸다. 2006년 도쿄에서 별세했다.
 
 ▲<처음 가는 마을>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정수윤 옮김, 봄날의책)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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