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당시의 선교사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언더우드, 아펜젤러,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같이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를 대답한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 중에는 이들만큼이나 조선을 뜨겁게 사랑한 최초의 호주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가 있다.
 
33살 젊은 나이에 풍토병으로 일찍 숨졌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조선 곳곳에 복음을 뿌린 데이비스 선교사. 한호선교 130주년을 맞아 그에게서 시작된 한호선교 의미를 짚어봤다.
 
 ▲아랫줄 가운데 남성이 최초의 호주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은둔의 나라' 향한 뜨거운 열정
 
1887년 극동아시아의 은둔의 나라,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간절하고 긴박한 요청이 담긴 편지가 호주의 한 작은 선교 소식지에 실렸다. 우연히 이 호소문을 읽게 된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호주 선교사가 된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10월 2일 부산을 거쳐 4일 서울에 도착했다. 앞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5개월여를 머물며 선교지 정보를 들으며 최종 행선지를 부산으로 정했다. 부산이 한국의 관문일 뿐 아니라 대표적인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14일 그는 어학 선생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부산까지 전도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짐은 성경과 전도지, 약간의 의약품 등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거쳐 부산까지, 장장 보름이 넘게 걸리는 장거리 보도 여행이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국제연대국 양명득 목사는 “당시엔 기차도 없었고 지금처럼 포장된 길도 물론 없었으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분명 위험할 수 있었다”며 “서구인으로서는 당시 다닐 수 없는 무리한 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노잣돈으로 쓸 무거운 엽전 다발을 가지고 가는 일, 낯설고 열악한 조선 여인숙에서의 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으로 고생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푸른 눈을 가진 그에겐 아이들과 어른들이 몰려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천안 삼거리의 여인숙에서는 목화솜을 파는 호남지방 상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설교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후일 데이비스 선교사를 “대단히 재능이 많고, 거룩하고 열정적이며, 이제까지 한국에 가장 훌륭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했다.
 
 ▲부산에 위치한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묘역.

짧은 사역이 남긴 크나큰 의미
 
당시 3월의 날씨는 예상보다 쌀쌀했다. 추위가 계속되고 비도 자주 내렸다. 고달픈 전도 여정을 이어가던 데이비스 선교사에게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풍토병인 천연두에 걸린 그는, 설상가상 폐렴까지 겹쳐 몹시 쇠약한 상태에 이르렀다. 동행한 어학 선생에 따르면 그는 여행 마지막 5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4월 4일 가까스로 부산에 도착한 데이비스 선교사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미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었다. 이튿날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 땅을 밟은지 6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이 호주에 알려지자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충격에 빠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한국 선교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여론으로 이어졌다. 1890년 5월 해외선교위원회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됐다.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처음 파송된 우리의 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교회가 받은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기를 원한다.…우리 주님은 그가 스데반을 일찍 부르셔서 안식과 상급을 베푸셨듯이 분명히 데이비스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현시하는 그 사건에 의해 고무되어 그 노력을 본받아 우리의 앞서 간 형제에게 주어진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표한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45-46쪽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오히려 한국선교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양명득 목사는 “처음으로 파송한 선교사가 부산에서 순교를 하면서 호주장로교회는 부산 지역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다”며 “1년 뒤인 1891년에 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 때부터 호주의 본격적인 한국 선교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 이후 수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됐다. 130년 동안 한국에 들어온 127명의 선교사들은 부산·경남 지역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특이점은 호주 선교사들 중에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공헌이 지대했다는 점이다. 선생님, 간호사, 의사 등 전문직을 가진 그녀들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 학교 등을 설립했다.
 
양명득 목사는 “데이비스 선교사를 비롯해 호주 선교사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이 우선이었고, 또 이러한 학교, 병원, 교회 등 건물과 재산은 점차 거의 모두 지역 노회와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다”며 “이는 지역교회가 선교활동에 앞장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호주 선교사들의 분명한 정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영등포산업선교회 국제연대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양명득 목사는 든든한 호주선교동역자로도 함께 하고 있다. 양 목사는 호주에 보관돼 있는 선교사들의 자료를 번역해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데일리굿뉴스
 
"선교사들 옛 기록에 대한 복원·연구 필요하죠"
 
올해 한호선교 13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총회장 림형석 목사)는 오는 10월 교단 대표단이 호주를 방문해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기념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양명득 목사는 “호주나 한국교회의 젊은 목회자와 청년들이 호주 선교사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며 “당시 선교사들이 꼼꼼하게 기록한 일기와 자료, 편지 등이 상당수 남아있지만 거의 번역이 안된 상태”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130주년 행사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오늘날 현대 시대의 선교에 맞춰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옛 선교 기록들에 대한 복원과 연구, 강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양 목사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었는지, 누구와 나누었는지, 그들의 삶과 신앙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시대를 불문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호주연합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127번째 마지막 선교사이기도 한 양 목사는 한국과 호주, 양국의 교회가 선교동역자를 서로 파송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선교사가 맡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양 국가를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며 “해외교회와의 동역을 통해 서로의 사역과 현안을 모니터링하며 건강한 교회로 자라나게끔 돕는 좋은 파트너로서 역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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