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가 있는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쪽은 합격자들의 세계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치러야 한다. 문학공모전, 기업 공채, 대학입시 각종 고시 등은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합격자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들을 습득한다. 그러다 보면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에 자연스레 빠지게 된다. 몇몇은 이 시스템이 잘못됐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대다수는 시스템이 그럭저럭 기능한다고 여긴다.
 
주목 받는 작가로 꼽히는 장강명 작가는 전직 기자로서의 취재력, 참신한 통찰력을 갖고 시스템을 취재했다. 그가 취재 결과물을 통해 보고자 한 것은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은 어떻게 새로운 좌절을 낳았나. 그리고 우리는 어떤 해답을 찾아야 할까.
 
 ▲<당선, 합격, 계급>(민음사), 장강명 작가.

좌절의 시스템이 된 '공채'
 

"대한민국의 젊은 취업준비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참고서를 사서, 또는 인터넷 강의로, 또는 비싼 수강료를 내고 학원에 가서 그런 문제를 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청년들이 새로운 알고리즘이나 특허를 궁리할 때 서울의 청년들은 머릿속으로 색종이를 접거나 돌리거나 오려내는 훈련을 한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치열한 입시 전쟁을 치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자신의 수능 성적에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서연고서성한'을 주기율표보다 정확하게 읊어내며 서열을 매기는가 하면, 대학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다시 대기업에 입사하려 목매다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장강명 작가는 <당선, 합격, 계급> 에서 당선과 합격이라는 제도가 사회적 신분으로 계급화되는 메커니즘을 파헤쳤다. '고시'에 비견되는 '언시'를 뚫은 기자였다가, 그 힘들다는 문학 공모전에 네 번이나 당선된 작가가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공채와 공모전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가 시스템에 반기를 든 까닭은 오직 한국 사회가 만든 간판 차별이 싫어서다.
 
저자는 한국 경제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를 과거시험과 신춘문예, 그리고 공채를 관통하는 경직된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제도적 한계에서 찾았다. 그는 "내부 사다리가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복권이나 다름없는 공모전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면서 "유능한 인재들이 투고보다는 공모전 도전을 택하면서 업계의 내부 사다리는 더욱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똑같은 현상이 지금 한국의 취업시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청년실업, 헬조선, 취준생, 공시족…청년 실업자 100만 시대',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이 시스템을 고수할 수 있을 지 우려가 제기된다.

'과거제도' 닮은 '공채제도'의 모순
 
물론 한국의 입시·공채 제도는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고 통과하기만 하면 안정된 지위를 갖게 된다. 단기간에 대규모 인원 채용이 가능하며 많은 이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준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간판'에 대한 집착과 합격에 따라 '기수'가 생겨나는 등 서열 문화를 양산한다.
 
저자는 이러한 속성들이 과거제에 근간해 있다고 설명한다. 대규모 공개시험을 거쳐 엘리트를 채용하는 공채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다. 과거제는 시험을 통해 능력 있는 '선비'를 선발한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폐단도 컸다. 우선 사회적 낭비가 심했다.
 
조선 정조 때에는 문과시험(정시 초시) 응시자가 10만 명을 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응시자가 20만 명을 넘겼다. 최종합격자는 한해 서른 명 남짓. 청년 수십만이 한창 일할 나이에 과거에 매달린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인재는 제대로 뽑지 못했다. 과학기술이나 경제, 민생은커녕 그 시대 국제 정세, 행정에 대해서도 무지한 인재들이 많았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한국 사회가 역동성을 잃어가는 것이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또 그는 공채 시스템이 상당 부분 운이나 심사자 취향에 좌우될 수 있는, 전문성이나 본질에서 벗어난 시험이라는 사실도 지적한다. 창의성과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 시험문제, 공무원 본연의 업무와 관련 없는 공무원시험 문제, 노조에 관한 견해를 묻거나 응시자를 괜히 주눅 들게 하는 압박면접 같은 과정들이 그 예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로 문학상을 받은 심재천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소설이 아닌 ‘공모전 모범 답안’대로 쓴 작품으로 등단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쓰고 싶은 작품을 쓰는 대신 시험 준비를 위해 힘을 낭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정말 슬픈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낭비 아닌가?"

'청년실업, 헬조선, 취준생, 공시족청년 실업자 100만 시대,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이 시스템을 계속해서 고수할 수 있을까. 2년이란 긴 시간을 이 책을 위해 할애했다는 저자는 책을 통해 뾰족한 해답을 내리진 않는다. 다만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걸 뿐이다. "어쨌거나 내 의견은 내 의견일 뿐이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나로서는, 이 책이 논쟁거리가 됐으면 좋겠다. 치열하고 생산적인 토론의 물꼬가 열리면 좋겠다." 물꼬는 이미 트여졌고, 논쟁은 이제 시작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