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38주년을 이틀 앞둔 16일, 광주 시내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향하는 교통편을 알아보니 시내버스 518번이 있다. "버스 번호가 조금 특이하네요?" 버스기사에게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버스라는 답이 돌아왔다. 국립 5·18민주묘지를 오가는 유일한 시내버스이기도 하다고.

 

시민들을 태우고 80년 광주와 현재를 오가는 '518번 버스'는 5.18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구청, 학생들과 계엄군이 충돌했던 전남대학교 정문을 지나 국립 5.18민주묘지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5.18민주화운동 38주년 이틀 전인 16일, 봉호초등학교 학생들이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데일리굿뉴스 


5월의 광주를 순례하다…'오월길 역사기행'

“5월 어느 봄날, 아이들이 풀밭에 나가서 놀고있었어요. 그 옆을 군인들이 지나쳐 가고있는데 아이들이 군인을 보고 와아아 환호성을 질렀죠. 군인들은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어요. 이 때 총알 6발을 맞고 숨진 11살 어린 소년이 바로 여기에 잠들어 있는 전재수 열사입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16일 아침, 이곳을 찾은 어린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강사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왜요? 왜 아이들한테 총을 쏜 거에요?”, “그 군인아저씨들은 벌 안 받았어요?”라는 질문도 간간히 나온다.

가장 어린 나이에 숨진 전재수 열사에 이어 김경철, 박금희, 윤상원 등 4명의 열사의 이야기가 차례로 소개됐다. 아이들은 흰 백합꽃 한 송이씩을 손에 들고 묘지 사이로 제각각 흩어졌다.

첫 희생자로 알려진 김경철 열사의 묘에 가장 많은 꽃이 놓였다. 김민수(13·광주 효동초등학교) 군은 “가장 먼저 희생되셨다고 해서 인상 깊었어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양재윤 군도 김경철 열사의 묘에 꽃을 올렸다. 양 군은 “김경철 열사가 말을 못하셔서 수화를 했는데도 군인들이 때렸대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5.18 광주 참상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펜터

망월동 5·18 구묘역도 오전부터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구묘역에는 당시 독일 기자로 광주의 참상을 영상에 담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펜터의 추모비가 있다. ‘죽으면 광주에 묻어 달라’고 한 고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이 안치돼 있다.

지난 1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오월길 역사기행'은 5·18 구묘역과 국립5·18민주묘지, 옛 전남도청을 순례하며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광주시교육청이 5·18민주화운동 38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현재까지 광주 관내 초·중·고교 약 2천3백여 명이 참여했다.

김지희 교사(광주 효동초등학교)는 “아이들 교과서에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서술이 단 몇 줄에 불과하다”며 “학생들이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을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고, 특히 광주의 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고 말했다.

6년째 안내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신영(26·평화통일교육센터) 씨는 "이전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어떻게 죽음을 당했는지를 주로 얘기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5.18을 슬프고 끔찍하게만 기억을 하더라”며 “5·18을 자랑스럽고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항 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묘사하는 말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응원하고, 학생들은 다친 사람들을 위해 헌혈에 나섰다고.

옛 전남도청 앞에서 만난 정순진(82·당시 농성동 거주) 씨도 당시 주먹밥을 나눴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 씨는 “집 밖에도 못 나가고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다. 나가는 사람은 족족 죽으니까 대학생들을 못 나가게 막기도 했다”며 “그래도 시위하러 나가겠다는 학생들 손에 주먹밥 몇 덩이를 손에 쥐여줬던 기억이 난다. 굶고 그런다고 하여 안쓰러운 마음에…”라며 말을 흐렸다.
 

 ▲21일 광주 시민군이 목포에 도착하면서 대규모 항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목포 지역의 모든 교회는 목포역 광장에 모여 비상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5·18민주화운동의 나눔과 희생 정신…"그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1980년 5월 21일 새벽, 광주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 2대를 끌고 목포로 내려왔다. 이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유혈 진압 소식을 전했고, 분노한 수만 명의 목포 시민들은 목포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집행부를 꾸려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신군부 철폐를 요구하며 매일 수차례 횃불시위와 시가행진을 벌였다.

현재 광주 성광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상규 목사도 그 현장을 지킨 한 사람이었다. 당시 목포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 목사는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항거를 이끌다가 5월 29일 계엄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16일 열린 5.18민주화운동 유네스코 등재 7주년 기념예배에서 만난 박 목사는 당시 광주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삶을 살았던' 공동체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통신도 두절되고 사람이 죽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헌혈이 이뤄지고 생필품을 나누고 자금을 모아주는 일들이 일어났다”면서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민주화 운동의 지도부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8년 전, 5월 25일 오후 2시 목포역 광장은 기독교인들로 빽빽히 찼다. 목포 지역의 모든 교회가 주일예배를 마친 뒤 광장에 집결해 비상구국기도회를 개최한 것이다.

 

당시 목포 기독교인들은 광주 항쟁을 '4·19와 명동구국선언의 법통을 잇는 역사적 시민 혁명'으로 규정하고, 군벌독재의 즉각 퇴진 등을 외치는 <광주시민혁명에 대한 목포 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광주항쟁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밝힌 최초의 공식선언이었다.

오늘날 '5월의 광주'를 기억하고 나눔과 희생 정신을 이어가려는 중심에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광주한빛교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교파를 초월한 연합예배가 열리고 있다.

광주 금남로 일대는 17일 열리는 전야제 준비로 분주했다. 남북의 평화 체제와 통일을 기원하는 현수막도 함께 걸려있었다. 박상규 목사는 “올해 5.18은 남북 간 평화의 무드가 조성된 가운데 맞아 더욱 뜻 깊다”면서도 “한국교회가 이러한 통일의 움직임에서 패싱되지 않도록 민족의 화해와 치유, 복음적인 평화 통일을 위해 더욱 깨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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