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이승만 정부의 불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대항해 자유와 정의, 진리를 부르짖는 의거였다.ⓒ위클리굿뉴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근대적인 민주공화정부. 하지만 이 정부는 한반도 전체의 정부가 되지 못했다. 신탁통치 찬반의 대립을 거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국제연합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 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결국 분단을 영구화하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한에서만 진행되는 총선거를 막진 못했다.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출범한 제헌국회는 7월 17일 대통령 중심제를 권력구조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제1공화국의 막이 오른 것이다.
 
4.19가 저항했던 것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신생 민주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나라의 민주적 기틀을 확립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와 집권연장에 집착했다. 헌법을 바꾸고(발췌개헌, 사사오입)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를 치렀다.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반발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떠오르자 시위는 전국단위로 확산됐다.

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지만 초등학생부터 대학 교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항거가 계속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유당 정권은 붕괴됐다.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신론>에서 4.19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혁명은 맨 주먹밖에 가지지 못한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한국사상 최초의 혁명이었다."

4.19는 대한민국이 명목상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원하지 않는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비록 1년 뒤 5.16군사 쿠데타로, 그 이후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권의 독재를 겪었지만 민주주의에 도전한 정부를 교체했던 ‘4월 혁명의 기억’은 국민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됐다.

1960년 4월 19일부터 오늘날까지 이러한 기억은 70년대 반유신 투쟁, 80년대 5.18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 2017년의 촛불집회를 통해 그때마다 되살아났다. 그리고 바꿀 수 없고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싸움을 국민들은 기어이 이겨냈다.
 
4.19정신 계승 배경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4.19혁명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19혁명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사건인 것이다.

이미 이룩해서 완전한 ‘민주주의’란 없다. 이것은 국민들의 감시와 참여, 저항으로 지켜내야 하는 가치인 것이다. 우리는 4.19당시 학생들이 외침을 잊으면 안 된다.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4.19당시 서울대학교 선언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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