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꽃 '유관순'…그 뒤엔 신앙적 멘토도 있었다"

최상경 (cs_kyoung@goodtv.co.kr)

등록일:2018-02-28 21: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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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꽃이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운동가인 유관순(柳寬順). 겨레의 과제를 온몸으로 떠안고 끝까지 자신을 희생하는 불꽃같은 삶을 산 그녀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옥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유관순의 신실했던 믿음과 조국을 향한 열정을 들여다보며 3월의 첫날을 맞는 우리의 현재를 반추해보자. 

 ▲유관순(1902~1920년).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병천 장터에 모여들며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바라본 '유관순 열사'
 
유관순의 집안은 3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해온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신앙의 명문가였다.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은 구국의 방법과 신념이 기독교에 있음을 일찍이 자각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에 헌신했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들은 유관순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아버지를 따라 지령리교회(현재 매봉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심을 키운 그녀는 지역을 순회하던 샤프(Alise H. Sharp) 선교사를 통해 신앙생활의 전환점을 맞기도 했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1916년 이화학당에 입학하도록 주선한 장본인이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기 유관순의 가치관이 집대성됐는데, 정동제일교회 손정도 목사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주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한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배웠다. 매일같이 새벽에 홀로 기도실을 찾아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신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은 독립운동의 확산을 위해 조직된 이화학당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탑골공원에서의 독립만세운동과 3월 5일 서울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 후 일제의 휴교령으로 귀향한 유관순은 고향 병천에서 매봉교회 교인들과 본격적인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병천 장터에 모여들며 전국적으로도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병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붙잡으며 조국에 대한 숭고한 희생을 감당했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유관순의 애국심을 고취시킨 '손정도 목사'

 ▲손정도 목사(1882~1931년)

 

뛰어난 제자 뒤에 훌륭한 스승이 있는 것처럼 유관순 뒤엔 신실한 신앙적 멘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유관순의 한일 정신을 고취시키며 훗날 애국지사로서의 유관순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평남 강서 출신인 손정도 목사는 원래 출세를 하겠다는 뜻을 품고 관리가 될 생각으로 평양길에 올랐다.
 
우연히 날이 저물어 하루 저녁을 한 목사의 집에서 머물게 된 손정도 목사. 밤새 새로운 학문과 세상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1907년 숭실전문학교를 나온 후 평양 남산현 교회의 부목사가 된 그는 1910년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로 거듭났다. 그 후 안동과 하얼빈, 간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벌였다.
 
결국 1912년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성치 않은 몸으로도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를 재임하며 유관순 열사 등에게 항일정신을 가르친다. 일제강점기 정동교회는 항일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19년 손 목사는 3·1 운동 직전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와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임시정부 설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됐고 국무위원(교통부 장관) 등의 중요한 자리도 역임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 손 목사는 결국 만주 길림으로 떠난다. 만주 땅에서도 손 목사는 노선이나 이념과는 관계없는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1년 일제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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