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교회 조건회 목사 ⓒ데일리굿뉴스

어떤 왕이 하루는 너무도 음식의 맛이 좋아서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이 사람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솜씨가 좋은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어디서 이렇게 준비를 했지." "아닙니다. 오늘 가게 주인이 얼마나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제공해 주어서 음식이 맛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왕은 가게 주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좋은 물건을 팔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장사꾼이에요. 농사를 지은 것을 가져다가 파는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니에요." 왕은 농부를 데려다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농사를 잘 지었느냐고. 어디에 그런 기술이 있냐고. 어떻게 그렇게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잘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단비 주시고, 적당한 기후 주시고 내게 건강주시고, 만 가지 은혜를 주셔서 거둔 것입니다. 저는 농부입니다. 저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내가 땀 흘린 수고의 대가라고만 여기는 보상적인 생활철학 속에 살아간다면 그 인생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내가 수고해서 내가 거둔 결과라고 한다면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사실 이런 공로주의적인 세계관에 매여 사는 사람은 감사보다는 언제나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이루어진 결과에 늘 만족함이 없고 수고에 비해 대가가 적다고 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농부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땀 흘려 수고했지만 하늘이 돕지 않고서는 결코 결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생각해 보면 벌써 심판 받아 마땅한 인생임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은 분에 넘치는 축복이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한 욕구 충족으로 인한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오늘 신앙인의 진정한 감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은 십자가의 은총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모든 감사의 뿌리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능력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감사는 행복을 낳습니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이고,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째,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는 진정 기적의 펌프이신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작은 오병이어를 손에 드시고 축사 즉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거기에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처럼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것을 또한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며 그 자체를 영광과 특권으로 아는 자에게 얼마나 또 크신 은총과 축복과 기적이 그 삶의 자리에 다가오겠습니까? 셋째,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바울과 실라 역시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저들은 찬송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감사는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낳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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