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교수ⓒ데일리굿뉴스

정치의 세계는 그야말로 정글의 세계다. 죽느냐 사느냐가 선거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치권의 풍경이 점점 삭막해진다. 말로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살아남기 위한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이 극에 달한다. 이러한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로 상대를 '타도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여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는 이것을 진정한 라이벌 관계라고 한다. 상대가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나 곤경에 처해있을 때 행해야 하는 도리를 음덕양보(陰德陽報)라고 한다. 음덕(陰德)이란 드러나지 않게 행하는 덕행을 의미하며, 양보(陽報)란 그것이 마침내 드러나 보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온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즉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남이 알도록 드러나게 하는 선행은 선행의 참다운 의미를 퇴색 시킨다는 뜻에서 쓰인 말이다. 따라서 남 몰래 선행이나 덕행을 쌓는 것이 드러내놓고 쌓는 것보다 더 큰 효과나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의 세계, 라이벌의 세계

이 같은 교훈은 백혈병을 이겨낸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라이벌이란 같은 분야에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를 의미한다.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실력을 비교할 수 있는 라이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 중에는 세기의 라이벌도 있는데 겉보기에는 싸움과 미움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보이지 않게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우정을 보여준 라이벌도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 테너 계의 양대 산맥인 두 사람은 지역감정이 심한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194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호세 카레라스는 1946년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의 자치령으로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곳이다. 이로 인해 스페인 지역과 카탈로니아 지역의 적개심은 우리의 영호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곳이다. 세계적인 두 테너 역시 이 같은 사회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많은 시간 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으나 스페인 마드리드로부터 독립하여 자치권을 쟁취하려는 카탈로니아 출신 카레라스는 마드리드 태생인 도밍고를 싫어했다.
 
아름다운 라이벌의 뒷모습

이러한 과정에 있던 그들은 사소한 일로 다투고 난 후 카레라스가 도밍고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각자 무대에서 활동하던 중 카레라스는 가수로서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1987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에 걸리게 된다. 이 병은 완쾌할 확률이 10%밖에 안 되는 무서운 병이다. 카레라스는 이 병의 치료를 위해 미국을 오고 갔다. 골수이식과 수혈 등 백혈병 치료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으므로 수년 동안 이어진 병 치료에 그동안 모아 놓았던 돈을 다 써버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의 '에르모사(Hermosa)재단'의 후원으로 항암치료와 조혈모세포 기증을 받아 백혈병을 완치할 수 있었다. 건강을 되찾고 돈도 다시 벌게 된 호세 카레라스는 지금껏 신세 진 에르모사 재단에 후원을 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와 일생의 라이벌이었던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 재단을 설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후원한 재단이라면 죽을지언정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거라며 관계자들에게 따졌다. 그러나 도밍고가 출연한 재단이라고 하면 자존심 강한 카레라스가 거절할 것을 걱정한 도밍고가 자신이 후원자임을 숨겼다는 것을 관계자들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이런 전후 사실을 알게 된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도밍고의 공연장에 찾아가 그가 노래를 부르던 중 무대로 올라가 많은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재단'을 설립하여 수많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경제적, 정신적 도움을 주고 있다. 세기의 라이벌이 만들어낸 따뜻한 우정은 백혈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꽃을 심어주었다.
 
우도(友道) 마저 삼킨 전쟁

우리 사회는 라이벌만 존재할 뿐 그 사이에 우정이 없는 삭막한 곳이 되고 말았다. 전에는 선거 때나 그랬지만 지금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라이벌은 나보다 잘나 보이는 상대를 말살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 못나 보이는 상대만 고른다면 그건 라이벌이라고 볼 수 없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거나 목적의식과 실력이 비등비등한 사람이 나의 적이 되어버리는 사회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서로의 존재, 상대방의 가치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확인해주고, 알아주며, 인정해주는 우도(友道) 마저 실종 시켜버렸다. 그 자리에서 싹마저 잘라 버리려 하는 적대감만 남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너무도 각박하고 서글프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호남을 대표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영남을 대표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은 진정한 라이벌의 출현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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