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교수 ⓒ데일리굿뉴스
시골 어떤 마을에 어떤 작은 교회 공동체가 있다고 해 보자. 목회자의 사례도 변변히 드리지 않는 곳인 이 공동체, 담임 목사의 은퇴시기가 다 된 가운데 다른 방도를 찾지 않으면 결국 이 교회 공동체를 파(破)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해 보자.

그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신학 공부를 마친 그 목사의 아들이 아버지의 후임으로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렇게 되면 이를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방도로는 없어질 교회 공동체를 이어 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세습’이라는 말은 그저 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나, 심지어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비판할 사람은 없다(그래서 최근에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은 큰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그 고통의 길로 가려고 한다”는 말도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개의 경우에 상당히 힘이 들고, 더 나아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교회 개척(church planting)이라는 고난이 없이 상당히 규모가 큰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그 아들이나 친척이 계승하려고 할 경우이다.

또한 상당히 규모 있는 교회 공동체의 장로들의 아들이나 친척이 계승하려고 하는 경우도 이에 포함시키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이는 혈연의 끈을 가지고 어떤 유리함을 얻으려 하는 것의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고난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면 그것을 세습이라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도 만연한 혈연, 지연, 학연의 끈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오랜 관행을 참으로 잘라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할 때에 비판한다면 더 그러하여야 할 교회 공동체에서야 얼마나 더 하겠는가?

고난스러운 과정을 생략하고, 그 후에 오는 과정에 동참하려는 일종의 사회적 편승을 이 세상이 비판적으로 보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세상과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으로 요구하는 교회 공동체가 그런 편승을 용인하고 심지어 조장한다면 그것이 과연 교회다운 결정과 행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면서 과연 아주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려는 지를 숙고(肅考)하고, 그에 근거해서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과연 성령님과 함께 생각하고 사는 방식이다. 그것을 벗어난 것은 비성경적이고, 비성령적이며, 비기독교적인 것이고, 그런 것은 결국 교회를 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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