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원이었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문갈렙 목사.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전한 것을 시작으로 소수민족 선교, 카페목회 등 종횡무진 사역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한충렬 목사의 순교를 잊을 수 없다는 문 목사는 "자신의 민족을 도운 요셉처럼 통일의 마중물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중국 이우염광교회를 섬기고 있는 문갈렙 목사. 카페 목회와 리수족 선교를 펼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열렬한 공산당원에서 복음 전하는 목회자로
 
1967년 흑룡강성에서 태어난 문갈렙 목사는 신앙을 가기 전까지는 공산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를 먼저 받아들인 문 목사의 아버지와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이었다.
 
"1993년으로 기억합니다. 공산주의가 너무 부패했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어요.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어머니가 보내주신 성경을 읽게 됐습니다. 정말 성경에 나온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숭상하던 공산당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죠."
 
문 목사는 교회에 가기로 결단하고 드렸던 첫 예배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정식으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전한 설교, 3년 동안 빠지지 않고 문 목사를 위해 기도해왔다는 한 성도의 고백에 기독교를 거부하며 쌓아왔던 마음의 벽이 모두 무장해제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역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문 목사는 가정신학교를 다니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1996년부터 중국 공안에 체포되기 전인 1999년까지 이어졌다.
 
중국 공안에게 한국 간첩으로 몰리며 더 이상 북한을 출입할 수 없게 되자 문 목사는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상처받는 조선족 아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집에서 직접 아이들을 돌보고, 지역의 불우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을 물심양면 지원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조선족들이 참 많았어요. 부모는 곁에 없고 나이든 조부모만으로는 모든 걸 감당할 수 없으니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죠. 부모 중에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어 가정이 깨지는 일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로 사역을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었다는 문 목사. 자신을 조선족으로 중국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답답었다고 한다. 문 목사의 고민은 2011년 횃불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풀리게 됐다.
 
"하용조 목사님이 조선족 사역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우리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먼저 보낸 요셉'이라고.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복음화와 통일을 이뤄가는 일에 큰 역할 감당해주어야 한다고 격려해주셨죠. 하나님께서 저를 중국에 보내신 이유를 깨닫게 된 순간이었어요."
 
"복음 전하고 싶단 리수족 아이들 보면 힘이 나요"
 
문 목사는 안정적인 사역지였던 흑룡강성을 떠나 2004년 절강성 이우시에 이우염광교회를 개척했다. 이곳에서 현지인과 조선족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가운데 2006년부터 운남 지역 리수족 선교를 지금까지 펼치고 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높은뜻정의교회와 협력해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기도 했다.
 
운남 선교는 문 목사가 <산비>의 주인공인 영국 선교사 제임스 O. 프레이저의 무덤을 방문한 것이 인연이 됐다. 어린 나이의 딸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는 리수족의 충격적인 실상을 보게 된 문 목사는 리수족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는 7개의 학교에서 204명의 아이들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리수속 아이들이 저를 보고 많이 늙었다면서 앞으로는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너무나 감격스러웠죠. 왕복 7,000km나 되는 길을 오가며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는데, 그 동안의 고생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문 목사는 지난해 4월 30일 피살된 故 한충렬 목사(장백교회)의 유가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순교한 한 목사가 마지막까지 운전했던 차를 타고 백두산에서부터 히말라야까지 횡단하는 프로젝트도 주도했다. 현재 그 차는 한 목사의 순교정신을 잇기 위해 티벳에서 사역 중인 선교사에게 양도한 상태다.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한 목사님의 차를 타고 히말라야까지 갔습니다. 순교의 정신을 중국 곳곳에 퍼뜨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죠. 차가 가는 곳마다 조선족 목회자들이 환영해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중국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만한 일이었어요."
 
중국 공산당 정권 아래 목회를 하면서 조선족 교회의 방향을 깊이 고민한 문 목사는 셀교회에 주목하고 한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2013년에 카페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커피를 팔아 운영비와 선교비로 쓰고, 주말에는 교회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문 목사는 자신의 비전에 공감하는 사역자를 만나길 기대하면서 중국 전역에 카페교회가 확산되길 꿈꾸고 있다.
 
문 목사는 "중국교회와 한국교회간의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때"라며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에 관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양적으로 성장한 중국교회에 돈으로 후원하고 선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하드웨어는 충분히 갖춰진 셈이죠. 하지만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이나 양육 프로그램은 중국교회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의 소프트웨어를 전수해서 중국교회의 하드웨어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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