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주 교수
올 여름 필자는 에큐메니칼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참석하게 되었다. 참석한 회의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련된 주제가 공통적으로 다루어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발발의 위험이 높아간다는 소문이 회자되는 현실이기에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세계교회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불편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13년 WCC 부산총회 이후, 한국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콩고, 남수단, 나이지리아, 콜럼비아 등, 심한 내전과 사회적 폭력사태를 겪고 있는 국가들과 함께 WCC가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우선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한반도가 처해있는 길고 지루한 분단과 대결상태 때문이다. 2014년 12월, 스웨덴 지그투나에서 WCC 평화협의회가 열렸다. 지난 세기 유럽사회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신앙운동인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의 창시자 죄더블룸이 1914년에 웁살라 대주교로 취임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스웨덴 교회가 WCC 평화협의회를 유치한 것이었다. 죄더블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하여 ‘삶과 봉사’ 운동을 창설하였고, 이 운동은 훗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존경 받는 교회 지도자로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던 죄더블룸은, 인류가 전쟁 없이 자유와 평화와 정의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적 책임이라고 믿었고, 이를 위한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스웨덴 평화협의회에서는 WCC가 선정한 '우선국가'들을 위해서 어떻게 에큐메니칼 협력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것인지, 긴 시간에 걸친 그룹별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전체 그룹이 참여하는 플레나리 보고시간이 이어졌다. 그 때, 아프리카에서 온 여성 활동가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하였다. 본인이 사역하는 지역은 마실 물과 기초 생필품조차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왜 WCC의 '우선국가'로 지정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WCC가 '우선국가'를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인 셈이었다. 그 순간, 한국인으로서 필자는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극심한 빈곤상태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들을 위해서 나누어야 할 세계교회의 기도와 사랑과 관심을, 이제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한국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엄습하였다. 물론 한반도 평화문제는 세계 평화와 직결되는 만큼, 세계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로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결해야 할 자체적인 과제를 최선을 다해 해결하면서, 세계교회의 우선적 주목과 관심을 요청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일찍이 군사정권 초기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지대함을 자각했던 신앙의 선각자들은 한국교회가 평화와 통일을 자신의 역사적 소명으로 자각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던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대화할 수 없으며,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저들과 맞서야 한다는 입장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모진 탄압을 받아 깊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 북한 피난민들이 주축이 된 교회일수록 공공(恐共)증을 넘어서기 어려웠고, 평화통일이라는 주제를 포용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전후 한국교회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성찰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채, 어언 6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왔다.
 
물론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왔다. 무력대결을 지양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한 교회개혁으로 공산주의를 극복하자는 호소도 있었다. 남과 북의 거시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겸허한 자기반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자성의 외침도 있었다. 대립과 갈등 속에서 공통성을 발견하고,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 간에 서로를 포용하는 자세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젖은 권위주의적 인격은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는 갈등요소가 되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인격이 양산된다면, 교회가 평화통일의 기반이 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양극화를 증폭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신앙의 선각자들이 예견했던 영성적·인격적·목회적·사회적 과제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불편한 진실이다. 한국교회는 정부와 국제사회가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일깨우는 예언자적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용서와 일치라는 성서적 가치관이 개인과 공동체적 삶 속에서 체화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를 세워가며, 평화통일을 향해 나가는 길에서, 신뢰받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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