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목사ⓒ데일리굿뉴스
우리의 삶에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한편의 영화와 책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 역시 인생의 말년에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내가 깨달았노라”(전 7:27)  “내가 깨달은 것은”(전 7:29)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그가 인생의 황혼에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 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 깨달음은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5절을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에 “깨달았도다”라고 말합니다. “깨달았도다”는 말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일련의 일들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행 10:34).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왕을 택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그리고 외모를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의 판단 기준은 외모이지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외모보다 우리의 마음을 잘 단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깨달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나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나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도다”(행 10:35). 지금 베드로는 “각 나라” “다 받으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라는 말은 모든 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민족의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다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신들만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는 어떤 족속의 어떤 사람일지라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나라, 어떤 족속의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구별하시나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 하나님은 구별하지만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 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여 구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여 세우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의 탄생을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계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여 못자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삼으실 때에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선택하여 구별하셨으나 모든 민족이 차별이 없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주인이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맡기고 또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를 맡기고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맡겼습니까? “각각 그 재능대로”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재능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2달란트 받은 자가 2달란트를 남기고 5달란트 받은 자가 5달란트를 남겼을 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칭찬하셨습니다. 만일 1달란트 받은 자가 1달란트를 남겼다면 우리 주님은 2달란트, 5달란트 받은 자와 함께 동일하게 칭찬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구별은 무엇을 종류나 능력, 은사에  따라 갈라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차별은 정당한 사유 없이 단지 외모나, 성별, 피부색, 출신지 등 외적인 조건에 따라 불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일에 구별은 필요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차별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동안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던 어부도 부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천한 창녀도 부르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죄를 짓고 있던 세리 마태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엔 아미마대 요셉과 같이 부자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산헤드린 공회원도 있었습니다. 무력으로 독립을 시도하려 했던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구별은 하지만 차별은 해서는 안됩니다. 노숙자라고 해서,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노약자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외국인 근로자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나 차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차별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중간에 막힌 모든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 2:9). 차별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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