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목사ⓒ데일리굿뉴스
너무나 다른 두 사람

모세와 아론은 형제입니다. 아론이 형이고 모세가 동생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일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현장에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지극히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으로 고백했지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 "여호와의 명예와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그 뜻을 돌이키사 이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큰 죄를 짓게 만들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방자하게 행하여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끝까지 죄에 대해 분노하며 그 죄를 척결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끝까지 백성들의 악함과 요구 때문이라며 자신의 죄를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며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한 형제요 함께한 지도자였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모세와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아론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아론을 살려 주셨습니다(신명기 9장 20절). 하지만 아론은 후에 나답과 아비후 두 자녀를 잃어야만 했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두 사람을 삼키므로 죽었습니다(레위기 10장 1-2절). 그러면 왜 아론의 두 아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을까요?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인 아론은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며 공포를 했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 앞에서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혼합주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종교혼합주의를 배웠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도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불에 타 죽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두 아들의 비참한 죽음은 아버지 아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이렇게 자식들은 부모를 배우고 자라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녀들 앞에서 욕설, 불평, 불만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극단적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가난해도 정직하게 진실되게 사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분노했던 모세는 이튿날 다시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시는 시내산에 올랐습니다(출애굽기 32장 30절). 왜 모세는 이튿날 다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까? 다시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여쭙고 묻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처럼 모세 역시 하나님께 여쭙고 물었습니다. 모세가 또 다시 산에 올라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기도의 무릎을 꿇는 사람이 다시 무릎을 꿇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또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슬프도소이다

그러면 다시 시내산에 올라 기도의 무릎을 꿇은 모세는 가장 먼저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모세는 가장 먼저 슬픔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출애굽기 32장 31절). 모세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할 때 자신의 감정을 과도하게 억제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역시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드러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을 때 “내가 슬프도소이다”(예레미야 1장 6절)라고 표현했고 여호수아 역시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슬프다고 표현했습니다(여호수아 7장 7절). 한나 역시 자신의 마음이 괴로움을 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며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역시 우리에게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편 62편 8절)고 권면했습니다.

왜 모세는 슬퍼했는가?

그러면 모세는 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슬프다고 말했습니까?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해 금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장 31절). 모세가 왜 슬퍼했습니까? 자신의 수고와 희생을 백성들이 알아주지 못해서입니까? 자신이 드린 중보기도를 백성들이 알아주지 못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금신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지은 큰 죄로 인해 슬퍼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도 이런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이 민족이 지은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내 자녀가 지은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지은 죄로 인해서는 애통해 하면서도 내 자녀의 죄로 인해서는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취직이 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아 속상해 하고 슬퍼하는 부모는 많아도, 내 자녀가 지은 그 죄로 인해 슬퍼하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분노, 죄인에 대한 슬픈 감정이 있어야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누가복음 23장 28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가는 내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점점 세상 속으로 빠져만 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한 슬픔이 있는 자만이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