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 대표종교에 걸맞은 한국교회의 역할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종교사회학)

등록일:2017-03-06 20: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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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선도했던 교회

한국에서 선교 초기에는,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며 설교를 들었던 동네 가옥의 사랑방이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교회당 건물이 생기기 전에는 여자
 ▲정재영 교수 ⓒ데일리굿뉴스
선교사들은 안방에서, 남자 선교사는 사랑방에 들러 각각의 공간에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ㄱ자 형태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면서 안방이라는 사사로운 공간에 갇혀 공공의 자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도 교회의 공공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남성과 여성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지만, 남녀 차별이 심했던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당시의 신분 질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백정촌에 살던 한 백정이 병이 나자 어의(왕의 주치의) 신분이었던 에비슨 선교사가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이 백정의 아들이 제중원이라는 근대 의료기관에서 교육을 받아 한국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백정은 개신교에 귀의하여 후에 교회 장로가 되었고 양반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ㄱ자 교회당을 지었던 한 교회에서는 장로를 선출하는데 주인과 그의 종인 마부가 함께 후보로 나와 마부가 장로로 선출되는 일도 일어났다. 그는 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의 주인이었던 이도 나중에 장로가 되어 자신의 마부였던 이를 담임 목사로 청빙하여 함께 사역을 하였다.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자발 결사체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공간으로서 수평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은 공공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를 뜻하였고, 초월의 가치에 잇대어 기존하는 관행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헌신하겠다며 공중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3·1 운동 당시에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신앙심에 기초한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하거니와 이와 같이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전국적인 조직이 바로 교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당시 신생종교로서 교인 수가 적었고 교회 수도 많지 않았지만 사회를 선도하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사회 자원이 풍부한 교회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작년 인구센서스에서 제1종교로 등극하였지만,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사람들이 교회 장로를 비롯한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이어지면서 과연 한국의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에 발표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사회신뢰도 조사에서도 교회의 신뢰도는 지난 2013과 비교했을 때 0.8% 상승한 20.2%에 불과했다. 숫자상으로는 제1의 종교가 되었을지언정, 그 역할에서는 제1의 종교다운 위상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할 만한 풍부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윤리를 가지고 있다. 개인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헌신이나 돌봄 등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 안에 본래부터 존재해온 것들이다. 곧 사회에 대한 공적인 책임이라는 과제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윤리를 바탕으로 교회는 시민 조직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공공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연결망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장이다. 현대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단절된 사람들이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 교회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신뢰를 발전시킴으로써 공동체주의 운동을 활성화시킬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발표된 인구센서스 결과 한국 개신교는 1천만 명에 가까운 신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운영 자금이나 재정 면에서도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 성인들의 월평균 헌금액은 2005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조사 결과 125,600원으로 나타나 1년 헌금액은 150만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한국 교회의 1년 헌금액을 추산하면, 한국의 개신교인 중 성인을 400만 명으로만 잡아도 6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10년 전 통계이니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다. 또한 교회마다 크고 작은 공간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회의나 교육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로, 교회는 다른 종교 단체나 사회 시설들을 압도할 정도의 개체수를 가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교회는 6만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사찰보다 3배 가량, 성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이다. 또한 전국 동·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가 4,000여 개이고 공공 행정, 국방 및 사회 보장 행정 기관을 모두 합한 행정 기관 수가 1만 2,000여 개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전국에 있는 사회 복지 시설도 2만여 개 정도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너무 많다는 뜻도 되지만, 이렇게 많은 교회가 협력해서 활동한다면, 전국의 지역 사회를 모두 엮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전국적인 민간 차원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지역교회의 연대

문제는 이렇게 풍부한 자원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 교회는 지나친 개교회주의로 인해 교회들 사이에 협력과 연대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같은 지역에 새로운 교회가 이전하거나 개척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며, 다른 교회를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어느 지역에 새로 개척한 교회 목사가 주변 교회를 찾아가 인사하며 협력을 요청했는데 ‘각자 잘합시다!’라는 냉소적인 반응만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농촌 지역의 한 작은 교회에서는 스스로 성경학교를 열 만한 여력이 없어서 지역의 큰 교회에 연합 성경학교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고도 한다.

이제는 개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전체 한국교회의 부흥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숫적으로는 증가했다고 하나 한국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면 위대한 종교로서 인정받을 수 없으며 또한 그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각 교단별로 구성되어 있는 노회나 지방회 같은 지방조직을 활용하여 그 지역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방조직도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단을 초월하여 뜻을 같이 하는 지역의 교회들이 협력할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전체주의가 지배를 했지만, 시민 혁명과 함께 개인의 권리가 중시되었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지나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흘러 많은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교회주의는 어떠한 중앙집권식의 통제를 인정하지 않고 개교회의 자주권과 자율을 인정하는 의미 있는 신조였지만, 오늘날에는 개교회의 이익에만 골몰하여 전체 교회의 공동체성을 해치는 부작용이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거듭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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