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팝 문화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시점은 그래미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월이다. 시상식의 중요한 의미는 단지 누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최근의 문화 동향을 결산하고, 한 때의 유행에 흘러 지나갈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역사적 기록으로 전수해주기 때문이다. 이 두 시상식이 없다면 수많은 좋은 노래나 영화들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시점마다 중요한 상징과 풍습과 일자를 지정하며 후대에 하나님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도록 기념했다. 이를 통해 지금의 사건은 역사가 되어 시간을 초월한 현재진행형의 유산이 된다.
 ▲빅퍼즐문화연구소 윤영훈 소장 ⓒ데일리굿뉴스


이번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직접적인 수상소감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사회자의 진행, 그리고 수상내역에 있어 반(反)트럼프 정서를 강렬하게 보여줬다. 20명의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역대 최다인 7명의 유색인종 후보자가 포함됐고, 그 중 3명이 수상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으로 인해 입국이 좌절된 시리아 촬영감독과, 시상식 불참 선언을 한 이란 감독의 작품들에 오스카를 안겨줬다. 이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작품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감독, 연기, 배경 모두에서 철저하게 흑인적이었던 <문라이트>에 돌아갔다.

생방송 중 결과가 뒤집힌 희대의 해프닝처럼, <라라랜드>는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최다 수상작이 됐지만 정작 작품상을 빼앗기며 찜찜함을 느꼈을 것이다. 30대 초반의 천재 감독 데미언 채즐의 연출은 분명 압권이다. 화려한 색체와 음악 속에 녹아있는 좌절된 청춘의 정서를 담아낸 <라라랜드>의 성과는 작품상을 받았어도 모두가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 <위플레쉬>처럼 ‘흑인 없는 재즈 영화’라는 아이러니와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는 기존의 흑인 영화와는 달리 흑백의 갈등이나 인권적 차원이 아니라, 마이애미의 흑인과 쿠바 이민자 게토 지역에서 성장하며, 처절하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흑인의 인생 성장 드라마라는 면에서 예술적 차별화를 시도한 수작이다. (이런 주제는 주로 백인들이 선호하는 장르다) 수려하고 처연한 조명 속에 “달빛 아래에서 모든 사람은 블루다”라고 말하는 영화 속 대사처럼, 이 영화는 직접적인 인종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도 인권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반면 지난 2월 12일 열렸던 59회 그래미상은 아카데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전년도 최고의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던 비욘세의 앨범이 아니라 아델의 <25>가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인생은 내게 레몬(시련)을 줬지만, 나는 레몬에이드를 만들어냈어." 이 노랫말처럼 비욘세는 개인적 이야기를 흑인 여성 전체의 서사로 확장해 냈다. 거의 모든 현대 팝의 장르를 절묘하게 절충해낸 예술적 성과도 놀랍다. 하지만 그래미는 상업적 성과는 뛰어났지만 전작 <21>의 답습에 그친 (오히려 전작에 비해 훨씬 못미친) 아델에게 본상 3개 부문을 수여했다.

그래미는 전년에도 당해 최고의 앨범이라 평가받던 흑인 래퍼, 캔드릭 라마의를 외면하고, 컨트리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올해의 앨범’을 안겨줬다. 지난 몇 년간 보수적인 그래미상 선정위원들은 옛 음악을 멋지게 재해석하는 기특한(?) 젊은 백인 아티스트들(테일러 스위프트, 샘 스미스, 아델 등)을 선호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무엇을 더 해야 그래미는 유색인종 아티스트에게 최고의 상을 안겨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화계의 흐름을 바라보며 기독교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지난 수십 년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트럼프가 강조하는 반이민자, 반동성애, 반유색인종의 정서를 암묵적으로 동조해 왔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전통적인 윤리관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염려한다. 가족을 보호하고 부양하는 성실한 아버지, 가족을 돌보며 기도하는 현모양처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존경하는 경건한 자녀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이민자의 유입으로 종교다원주의 사회가 되고, 동성애자들로 인해 전통적 가족제도는 붕괴됐으며, 패미니즘의 영향으로 어머니들이 가정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미국 백인 부모들은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 결혼 상대자로 다른 인종이나 동성 애인을 데려올지 모른다는 염려에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보수적인 정치인에 표를 던지고, 이것이 성경적이라 믿는다. (정치인들이 이런 복음주의 유권자의 심정을 이용한 측면도 많다.)

나는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의 사회문화관과 가족주의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많은 문제의식과 시대적 염려를 느낀다. 하지만 성서는 이 문제와 함께 또 다른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세속적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책임이다. 또한 죄인에 대한 배제와 추방을 넘어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는 은총과 평화 속에 공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사회와 문화는 분명 우리에게 많은 가치혼란을 불러온다. 이 시점에 그리스도인은 그래미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아카데미의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그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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