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인 올해,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화해와 연합의 기치를 높이 내걸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교회의 최대 숙원이라 할 수 있는 '복음통일'을 위한 준비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조짐이다. 올해 창사 20주년을 맞는 GOODTV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중특별기획을 마련했다. 한국교회의 통일사역, 그 역사의 생생한 증인들을 만나보고 다양한 사역을 통해 복음통일의 그림을 그려가는 현장을 찾아가본다. 또한 '복음통일한국'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모색하고,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특별대담과 포럼도 개최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통일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시작됐다.ⓒ데일리굿뉴스
 
한국교회 통일운동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진보적 신학을 가진 교회들이 모인 에큐메니칼 진영의 주도로 꽃피웠다. 남북교회 만남의 계기를 이끌어냈던 1984년 도잔소 회의나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 등이 주요 성과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은 1990년대 인도적 대북지원을 통해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5년 발생한 북한의 대홍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는 대북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독 NGO의 창립도 활발히 일어났다.
 
"한국교회 통일운동, 민주화 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한국교회 통일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자라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0년대 당시 통일 논의를 주도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은 통일이 되기 위해선 사회 전반으로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다방면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통일 논의가 국민 전반에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통일'을 한국교회의 중요한 선교 과제로 설정한 교회협은 1982년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당시 정부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북한을 적으로 인식하는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시절, 평화통일을 위한 작은 노력조차 불온한 활동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등 해외 개신교계의 지원으로 일본 도잔소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도잔소 회의)'는 남북교회 대화의 물꼬를 터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차 회의에선 북한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1986년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최초로 만나 성만찬을 나누는 초석이 됐다.
 
노정선 교수(연세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는 통일이라는 말만해도 잡혀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도잔소 회의를 계기로 남북교회 만나기 시작해 평화통일을 위해선 서로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즈음에 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이 하나의 정리된 형태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해외 개신교계의 적극적인 지지와 당국의 꾸준한 방해에도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노력 덕분이었다. 1988년 2월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8.8선언)'은 분단 해소에 대한 신앙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통일운동사에 길이 남을만한 쾌거였다.
 
특히 1988년 7월 노태우 정부가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도출해 내거나 앞당기게 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8.8선언에서 1995년을 '평화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 교회협은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법적 제도 개선과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에서 통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드는 활동에 전념하며 1990년대를 보냈다.
 
노정선 교수는 "서로 적대적이었던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진전을 위해 에큐메니칼 진영의 수고가 많았다"며 "지금의 한국교회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인 담긴 8.8선언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은 인도적 대북지원을 통해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데일리굿뉴스
 
'인도적 대북지원'으로 하나된 한국교회 통일운동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남북 신뢰관계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8.8선언은 한국교회 내에서 통일 논의를 확산시키는 단초가 됐다. 선교적 차원에서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을 통일운동으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1993년 남북나눔운동본부의 창립은 한국교회가 정치적 이념을 넘어 북한 주민들의 어려움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런 정신은 "사랑의 나눔이 민족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평화와 통일을 구축하는 씨앗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는 내용이 담긴 창립선언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1995년 발생한 대홍수는 북한을 심각한 식량위기로 빠지게 만들었다. 북한의 수해 소식이 알려지자 교회협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같은 한국교회 주요 연합단체와 각 교단들은 인도적 대북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동포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껴안았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회장)는 "교회가 펼칠 수 있는 평화 통일 운동은 정치적인 협상보다는 인도주의적인 만남과 나눔과 사랑의 표현과 실천"이라며 이 시기 남북나눔운동의 의미를 설명했다.
 
대북활동을 위주로 하는 기독 NGO의 창립이나 활동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유진벨재단은 식량 보내기 운동을 시작으로 1997년 결핵약, 이동 X-ray 검진차 등 대북결핵퇴치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는 2000년부터 북한에 젖염소보내기운동을 시작했고, 기아대책은 2002년부터 북한에 분유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인도적 대북지원의 물꼬가 트이자 남북교류도 활발해졌다. 민간 주도의 금강산 관광과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6.15 공동선언 이후 조성된 개성공단이 대표적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남북교류와 인도적 대북지원은 이명박 정부 때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5.24 대북제재 조치가 시행돼 대부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2015년은 분단 70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해로 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2015년 8월 9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광복 70년 한국교회평화통일기도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30여 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한 박근혜 정부는 남북교류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를 폐쇄시킴으로써 남북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더군다나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과 사드 배치의 강행으로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한국교회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김명혁 목사는 "우리 안에 있는 독선주의를 포기하고 엎드려 울면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 없는 화해와 통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사회와 교회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 '남남갈등의 극복'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 김 목사는 "모두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의인 의식'을 지니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 문제"라며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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