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 것이다.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보살펴준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해야 할 이웃사랑의 모델로 제시된다.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에게는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베푼, 영원히 잊지 못할 친구가 있다. 김 목사는 "앞 못 보는 내게 사마리아인처럼 선한 사랑을 베풀어준 친구의 우정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고백했다.

"친구의 도움이 오늘날 실로암안과병원의 기초 됐다"

김선태 목사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기숙사는 난방이 되지 않아 겨울이면 방안에 떠놓은 물이 얼 정도로 추웠다. 학교 식당의 밥 한 그릇이 단돈 13원이었지만 그마저도 없어서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김선태 목사
김 목사는 "다른 동료들이 식사하고 있을 때면 나는 고픈 배를 부여잡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안고 하나님께 삼시 세 끼를 먹는 것이 합당치 않다면 두 끼라도 먹게 해주시고, 두 끼도 합당치 않다면 한 끼라도 먹게 해주십사 기도를 드렸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소나무 순을 진수성찬처럼 먹던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있었다. 현재 미국에서 목회 사역을 하고 있는 강형길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산에 올라 흐르는 약수로 배를 채우고 소나무 순을 같이 잘라먹으며 함께 기도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던 강 목사는 3년 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버스와 택시 운전,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힘든 시기를 겪다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김 목사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당시 김 목사의 가정형편은 도저히 항공료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 목사는 "나의 직장생활을 위해 아내는 점심을 굶어가며 도시락을 싸줬다"며 "두 딸에게 아이스크림 과자를 사줄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미국길에 오르게 됐고 강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친구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자신의 집을 내 집처럼 편안히 쓰라고 했다"며 "한국에서 많이 굶었을 테니 언제든 자기네 식당에 와서 돈 내지 말고 마음껏 식사하라"고 했다. 당시 강 목사의 아내는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김 목사는 미국의 시각장애인들이 공부하고 훈련하는 기관에서 1년 가까이 공부할 수 있었다. 김 목사는 "친구가 수시로 나를 찾아와 불고기와 김치를 가져다 줬고, 덕분에 미국 기관의 교수들과 파티도 열 수 있었다"며 "이때 받은 훈련과 공부가 오늘날 의료법인 실로암안과병원, 사회복지법인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회가 형성되는 기초가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정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강형길 목사의 대가 없는 사랑과 정성과 헌신이 나를 세계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됐고, 기회를 갖게 해줬다"며 "친구가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은 말로 다 보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선태 목사의 이야기는 <신앙계> 1월호에서 자세히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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