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목사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고,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되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사람이 살면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희망이 생긴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는 시력이 나빠서 연주 때마다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악보를 외워버렸다. 오케스트라 특성상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파트 악보까지 모조리 외웠다. 한번은 연주를 목전에 두었는데 지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부득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지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의논 끝에 악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토스카니니는 어렵지 않게 모든 곡을 잘 소화하여 연주를 잘 마쳤다. 이것이 바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는 말했다. "나의 나쁜 시력이 나를 명지휘자로 만들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다. 하나님은 문을 닫으실 때에 다른 문을 여신다. 길이 막혔을 때에 다른 길을 여신다.
 
현 시국은 한마디로 앞이 캄캄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잃는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다. 때로는 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그러나 잃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얻는 것도 많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 얻는 것도 있다고 고백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잃고 얻는 이런 삶의 사이클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게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잃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을 생각하지 않고, 잃는 것만 안타까워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역설적이다. '높아지려면 낮아져라. 얻고자 하면 버려라. 살고자 하면 죽으라. 이기고자 하면 져주라.' 그런데 높아지려고만 한다. 얻으려고만 한다. 살려고만 한다. 이기려고만 한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것이다.
 
자세히 보면 행복은 선택에 달려 있다.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운명이 달라진다. 부정적인 사람을 선택하면 기업이 병들게 된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을 선택하면 기업이 건강해진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기업에 '어떤 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의 운명이 달라진다. 이 세상에는 불행한 순간만 산 사람도 없고, 행복한 순간만 산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이 공존한다. 그런데 어떤 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항상 '불행한 나, 상처받은 나'를 선택한다. 반면에 어떤 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항상 '행복한 나'를 선택한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겠는가? 두 말할 것 없이 '행복한 나'를 선택하며 사는 사람이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가 있었다. 네 명의 아내를 통해 1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라헬이 마지막 12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는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일찍 죽는 사람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어린 자식을 두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죽어 가는 라헬의 입장에서는 베노니라는 말이 나올만하다. 얼마나 슬펐겠는가?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바꿔 부른다. 베냐민이란 '기쁨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소망과 위로의 이름이고 긍정적이며 희망찬 이름이다. 야곱은 누구보다도 이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열국의 어미인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축복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도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다.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네 후손 가운데서 여러 왕들이 나올 것이다.'(창35:9~11)라고 축복하셨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야곱의 슬픔은 엄청 컸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태어난 아이를 생각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다. 그래서 '베냐민'이라고 한 것이다. 베냐민을 얻음으로 '완성된 축복'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된다. 하나님은 그냥 가져가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은 결코 '베노니'가 아니고 '베냐민'이다. 하늘과 땅에서 하늘의 별같이 빛나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창대할 베냐민이다. 뒤집어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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