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녹스는 것이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중국 공산정권의 추방 위협 속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 선교를 위해 힘썼던 故 방지일 목사의 선교의식을 본받고 목회철학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예장통합 세계선교부가 11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故 방지일 선교신학 연구논문 발표회'를 개최했다.ⓒ뉴스미션

故 방지일…"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예장통합 세계선교부가 주최하고 총회 세계선교연구위원회가 주관한 '故 방지일 선교신학 연구논문 발표회'가 11일 오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열렸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에서는 '방지일 목사 선교신학 연구논문 공모 시상식'과 논문 발표회가 진행됐으며 △민경운 목사(성덕교회) △홍경환 선교사 △임종표 선교사 △안교성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등이 발제자로 나섰다.
 
발제자로 나선 민경운 목사는 '총회 회록을 중심으로 살펴본 방지일 목사의 선교사사역 고찰'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민경운 목사는 방지일 목사의 선교사역을 △제1기: 어학공부 시기 △제2기: 교회 개척과 목회의 시기 △제3기: 총회에는 구체적 보고가 없는 사역 시기로 나눠 설명했다.
 
1937년 4월 아버지 방효원 목사의 뒤를 이어 중국 산동 산동선교회로 파송된 방지일 목사는 3년간 어학을 익히는데 힘썼다.
 
민 목사는 "당시 산동 선교지의 상황이 전란의 영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동역했던 선교사들은 사택을 약탈당하는 등 상황이 어려웠을 것"이라며 "방지일 목사는 태어난 지 석 달 된 셋째 딸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학공부에 힘썼다"고 말했다.
 
3년 뒤 방 목사는 어학공부를 마치고 본격적인 선교사역에 나섰다. 방 목사는 30여 년의 선교기간 동안 40개의 교회를 개척할 정도로 선교에 힘을 쏟았다.
 
민경운 목사는 "방 목사의 선교사역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맡아 하다가, 교회가 성장하면 교회당을 새로 짓고, 교역자를 청빙했다"며 "이것이 방지일 목사 선교사역의 특징이자 핵심"이라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민 목사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한 이후부터 1957년 방지일 목사가 귀국하기까지, 방 목사의 선교사역에 관한 구체적 보고는 총회 회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한반도는 남북 분단이 시작됐고, 선교지인 중국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선교지와 한국의 공식적인 연락이 두절됐으며, 총회 회록도 온전하게 보관되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방지일 목사의 저서에 따르면, 그는 자치적인 목적으로 조직된 한국 교민회에서 외교위원장 겸 교무위원장을 맡아 한국 동포 송환사역 및 구제사역을 감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경운 목사는 "동역하던 선교사의 가족들이 피살당하고 다른 선교사들이 귀국한 후에도 끝까지 현지에 남아 선교사역을 감당했다"면서 " 그의 사역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성도들을 사랑으로 돌봤던 목회자이자 선교사였던 방지일 목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그는 "방지일 목사의 선교 방향과 현재의 선교를 돌아보며 새로운 선교 방향을 제시하고, 다양한 선교연구를 통해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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