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홍 교수
신앙의 시대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알았다. 참 신앙은 인간회복이 이뤄진다고. 중세 말 르네상스의 외침은 인간회복이었다. 좋은 신앙인은 선한 이웃이 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신앙인에게 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정의가 함께하는 일종의 전인적 신앙이다. 

이를 깨닫기 까지 1000년의 시간이 요구되었으며, 결국 종교개혁에로의 길을 열었다. 로마교회의 교황은 모든 권한을 가졌다. '신의 대리자'이기에 가능했다. 중세교회에게 개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종교개혁은 그 권한을 모든 크리스천에게 나누었다. 만인제사장설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칼빈은 이를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로 나누었다. 쉽게 말해 모든 성도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더 이상 성직자 한 사람이 갖는 권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개혁은 개개인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다르게는 신앙이 인간을 찾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좋은 신앙인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라틴어 성경을 일반어로 번역했다. 이제 각 성도가 성경을 소유할 수 있었다. 직접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혁명이 이뤄졌다. 영적 제사장인 모든 성도가 성경을 손에 들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 종교개혁의 씨알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의 최대의 업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요사이 한국교회에서 행복한 신자 만나기가 어렵다. 너무나 과중한 교회생활로 성도들이 힘들어 한다. 여가시간은 교회사역으로 채워진다. 그래야 장로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기간 장로하고 지쳐서인지 노는 장로 이름 장로가 적지 않다. 

어쨌든 교회는 있되 개인은 없다. 교회를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공동체 코이노니아가 넘쳐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도 있고 개인도 있어야 하는데 신앙도 있고 인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한국교회가 이제 좋은 신앙인이 좋은 아빠 좋은 형제 선한 이웃 바른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하여야겠다. 너무 프로그램 위주로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행사를 해도 교인이 허전하면 피곤하면 고려해야 한다. 

이제 교회가 성도를 위해 존재해야겠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섬기는 교회로 거듭나야겠다! 세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목회자도 넘 피곤한 목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행복한 목회자, 행복한 교인이 되도록 목회 패턴을 바꾸었으면 한다. 그래서 안식이 있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천국을 맛보는 그런 교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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