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킨 2세 아르메니아정교회 총대주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 25~26절.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세계교회협의회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남녀 성직자 여러분, 이 총회에 오신 사랑하는 참석자 여러분.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저희는 한없는 영적 기쁨을 가지고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성경에 나오는 아라랏산 둔덕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 깊은 아르메니아에서 왔습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서, 기독교국가를 건설했던 사람들입니다.

옛날 모교회 성 엣츠미아진(Etchmiadzin) 관구로부터 17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지내 온 강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온 세상 방방곡곡에 비추기 위해 선교활동에 매진하시다가, 여기 모이신 우리 형제 자매들과 친구들과 동역자 여러분 모두에게 전해 올립니다.

이번에 저희들을 초청해 주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특별히 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한국사람에 대해 한 가족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처럼 한국 국민들은 아픔을 아는 민족입니다. 오랜 세월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분단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그들의 창의력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빛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점증하는 힘을 우리는 모두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계교회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 임원들, 그리고 WCC 총무이신 울라프 픽쉐 트페이트 박사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르메니안교회는 지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협의회 회원으로 지내올 수 있게 해 주셨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최근에는 트베이트 박사님이 성 엣츠미아진 관구를 예방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우리 인간들의 심령에 빛을 주십니다.

방금 우리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났던 기적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몇 시간이 안돼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너무도 의기소침해서 그들의 스승도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과 임재를 통해 그들의 마음에서 의심을 제거해 주시고, 대신 소망과 믿음, 구원의 하나님을 깨닫도록 깊은 인상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을 만나 그들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지녔던 불신과 실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들은 곧 교회가 됐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방과, 그 방에 있던 제자들 가운데는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일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장 16~17절)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각자는 자기 나름의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의 말씀은 진실로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이 한 장소에 한 마음으로 한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처럼 모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다르고, 모두 독특하지만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들입니다. 우리들의 공통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엮어줍니다. 이렇게 일치를 이루는 일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첫번째요,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힘쓸 것은 영적인 일치입니다. 믿음과 봉사에서 하나됨,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온 세상에 복음증거를 하는 일에서 하나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복음증거활동에 동반돼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사려가 깊고 침착하고 세심한 배려가 수반된, 즉 책임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치를 이루어가시는 주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일을 흐지부지 해 버린다면, 이는 ‘언덕 위에서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비전을 분명히 보여주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작업을 그 근본에서부터 저지하려는 행동입니다.

성서시대가 시작되기 전 이교도들의 문화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이 물질적인 가난이거나 정신적인 가난이거나 간에 그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은 역시 분명합니다.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의 짧은 생애와 사역의 기간을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을 구제하는 일로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의 옛 예언자들의 말씀을 부연해 가르치시면서 인간 가족 속에서 추구해야 할 중심되는 가치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시고, 참된 인간이 되려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같은 비중으로, 우리의 가난의 문제, 또는 인간의 질병 등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그리스도이신 당신 자신에게 연결지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주님께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셨던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초대해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 ‘다가서 있는’ 그리스도의 그릇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표어를 내세우게 됐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추진하는 선교활동을 강건케 하셔서 저희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의 길로 가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날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자만심에 부풀어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산다는 말은 자기 이웃의 권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 무슨 방법으로든 자기 뜻을 관철하며 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잇습니다. 우리들이 엠마오로 잘못 가고 있을 때, 따라 오시며 우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우리가 참패를 당한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을 강화하셔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후덕함과 형제애와 소망을 함께 나누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이웃을 향해 우리가 인격적인 접근을 할 것과 어느 누구에게든지 예외 없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며, 인격적 성결을 이루도록 돕는 일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지닌 고유한 사명이며 어느 행정기관이나 과학기술에 위임하거나 위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내세운 주제의 한가지는 선교에 우선적인 중점을 두고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차고 넘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늘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 25~26절.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저희는 한없는 영적 기쁨을 가지고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성경에 나오는 아라랏산 둔덕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 깊은 아르메니아에서 왔습니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서, 기독교국가를 건설했던 사람들입니다.

옛날 모교회 성 엣츠미아진(Etchmiadzin) 관구로부터 17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지내 온 강복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온 세상 방방곡곡에 비추기 위해 선교활동에 매진하시다가, 여기 모이신 우리 형제 자매들과 친구들과 동역자 여러분 모두에게 전해 올립니다.

이번에 저희들을 초청해 주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특별히 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한국사람에 대해 한 가족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처럼 한국 국민들은 아픔을 아는 민족입니다. 오랜 세월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분단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그들의 창의력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빛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점증하는 힘을 우리는 모두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계교회협의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 임원들, 그리고 WCC 총무이신 울라프 픽쉐 트페이트 박사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르메니안교회는 지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협의회 회원으로 지내올 수 있게 해 주셨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최근에는 트베이트 박사님이 성 엣츠미아진 관구를 예방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이 우리 인간들의 심령에 빛을 주십니다.

방금 우리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났던 기적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몇 시간이 안돼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너무도 의기소침해서 그들의 스승도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과 임재를 통해 그들의 마음에서 의심을 제거해 주시고, 대신 소망과 믿음, 구원의 하나님을 깨닫도록 깊은 인상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을 만나 그들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모인 무리들이 지녔던 불신과 실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들은 곧 교회가 됐습니다. 예루살렘의 그 방과, 그 방에 있던 제자들 가운데는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일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장 16~17절)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각자는 자기 나름의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의 말씀은 진실로 여기 모인 우리들에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이 한 장소에 한 마음으로 한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처럼 모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가 다르고, 모두 독특하지만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들입니다. 우리들의 공통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엮어줍니다. 이렇게 일치를 이루는 일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 가운데 가장 첫번째요,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힘쓸 것은 영적인 일치입니다. 믿음과 봉사에서 하나됨,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온 세상에 복음증거를 하는 일에서 하나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복음증거활동에 동반돼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사려가 깊고 침착하고 세심한 배려가 수반된, 즉 책임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치를 이루어가시는 주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일을 흐지부지 해 버린다면, 이는 ‘언덕 위에서 비추고 있는 빛’을 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비전을 분명히 보여주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작업을 그 근본에서부터 저지하려는 행동입니다.

성서시대가 시작되기 전 이교도들의 문화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이 물질적인 가난이거나 정신적인 가난이거나 간에 그들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은 역시 분명합니다.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자신의 짧은 생애와 사역의 기간을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들을 구제하는 일로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의 옛 예언자들의 말씀을 부연해 가르치시면서 인간 가족 속에서 추구해야 할 중심되는 가치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시고, 참된 인간이 되려면 이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같은 비중으로, 우리의 가난의 문제, 또는 인간의 질병 등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그리스도이신 당신 자신에게 연결지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주님께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셨던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또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초대해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전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 ‘다가서 있는’ 그리스도의 그릇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표어를 내세우게 됐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추진하는 선교활동을 강건케 하셔서 저희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의 길로 가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날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자만심에 부풀어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산다는 말은 자기 이웃의 권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 무슨 방법으로든 자기 뜻을 관철하며 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잇습니다. 우리들이 엠마오로 잘못 가고 있을 때, 따라 오시며 우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우리가 참패를 당한 순간에도 그리스도는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을 강화하셔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후덕함과 형제애와 소망을 함께 나누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이웃을 향해 우리가 인격적인 접근을 할 것과 어느 누구에게든지 예외 없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며, 인격적 성결을 이루도록 돕는 일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교회가 지닌 고유한 사명이며 어느 행정기관이나 과학기술에 위임하거나 위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내세운 주제의 한가지는 선교에 우선적인 중점을 두고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차고 넘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늘 따라야 합니다.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은 최근에 일어나고 잇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이 참혹하게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아픔을 느낍니다. 근년에 이르러 자주 빈발하고 있는 사건들은 이것이 과격분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박해인 것으로 판명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때로는 신분을 가릴 것 없이 무차별하게 죽어가거나, 때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래로, 아르메니아 주변에서 보면, 기독교인 사회공동체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생산적으로 기여하면서 살았고, 중동지방 전체적으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이 사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는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들이 해당국을 위해 대처한 내용들은 그 사회가 정의를 사랑하는 사회나, 그리고 그들 대다수 국민 또는 정부가 인권을 존중하느냐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동지방에서 폭력 아래 압도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저 순교를 당할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나라에서 그리고 이번 협의회가 우리의 입과 행동을 모아서 이런 폭압적인 일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해당 지역에 평화가 성취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희 아르메니안인들을 괴롭힌 특별한 세력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당한 이 격통을 아시는 분들은 다 잘 아시고 계십니다. 오는 2015년이면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과 나고르노-카라바와 세계 모든 나라들이 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던 최대의 비극적 참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오토만 터어키에 의해 자행된 대량 인증학살 사건이었습니다. 1915년 이후 4세대에 걸치 세월이 흐르도록 그날의 공포가 아직 우리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모종의 공식적인 조치가 취해지는 것으로 또는 온 세계가 달려들어 가해자를 저주한들, 정의를 향한 우리들의 간구가 성취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장차 올 22세기와 그 이후에도 지구상에서 이런 폭력과 비극적인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꿈꾸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해 줍니다. 대단히 감사한 것은 근년에 WCC가 우리 형제교회들과 20개국 이상의 나라들과 더불어 아르메니아 대량학살 사건을 탄핵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지금부터 100여년전 에 이러한 1915년의 잔학, 학살, 인종청소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책을 세웠다면, 그 고동, 그 참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후일에 유럽 캄보디아 아프리카에서 겪은 동류의 희생자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동안에도 발생하는 죄악들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온 세계가 준수해야 할 지침을 세우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내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군사개입을 해야 할는지, 나고르모-카라바공화국의 자유민들의 자결권을 확보하기 위해 싸울 것이냐 말것이냐 하는 문제가 포함될런지는 차치하고도라도 말입니다. 이 기본 인권 조항을 범하게 되면, 이 세상 어떤 나라든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주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와 인권의 기반이 되어있지 않는 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잠정적일 수 밖에 없고, 표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항구적인 가치들은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얻은 결실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교회가 유산으로 상속해 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가치들을 우리 사회 속에서 가꾸는 일이,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는 바 선교적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선교를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가치들을 찾아보려면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그분이 창설하신 운동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있개 말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둘러보면, 혼동과 슬픔 뿐인 것을 봅니다.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시간들 속에서, 세계는 진정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었던 여행자들은 우리들과 똑같이 혼동 속에 있었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들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셨고, 그들과 함께 걸어주시며 그들의 관심사에 대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임재는 그들이 살고있던 세상에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반드시 붙들고 있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성취하기 위하려, 인간의 복지를 이루기 위하려 먼저 해야할 일은 엠마오 도상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서며, 함께 동행해주고, 그들의 짐을 덜어줘야 합니다. 가장 높은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들의 발은 땅에다 확실하게 뿌리박고,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눈과 눈을 마주보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이 총회 기도회에 동참하여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 성도회의 선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된것은 저에게 무한한 기쁨이요, 제 마음에 큰 위안입니다. 간절히 빌기는 성령님께서 항상 여러분의 마음에 용기를 주시고, 진실로 세상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을 참된 평화와 참된 정의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총회에 강연자로 초청해 주셔서 그리스도 안의 형제된 사랑의 친교를 나누게 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그리고 모든 인류 위에 함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카레킨 2세 아르메니아정교회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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