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코스모스가 꽃을 피운 채 한들거리고 설악산 첫 단풍 소식이 전해질 무렵이면 매년 바빠지곤 했다. 노벨상이 부문별로 발표될 시기였기 때문이다. 북유럽 스웨덴과 우리나라의 시간차에 따라 노벨상은 저녁 7시를 전후해 발표되곤 했다.
 
노벨위원회의 발표를 토대로 노벨상 수상자를 방송사 메인뉴스에 내보내려면 각별한 순발력이 필요했다. 하루 만이 아니었다. 노벨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 등 7개 부문에 걸쳐 일주일 동안을 긴장 속에 보내야 했다. 방송사 보도 책임자 시절의 이야기이다.
 
지금처럼 방송사 시스템이 잘 갖춰지기 전에는, 노벨상 수상자 기사를 쓰는 한편으로 자료 화면을 준비하도록 요청하고, 각각의 작업이 완성되면 VCR 테이프를 들고 뉴스센터까지 풀 스피드로 달려가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렇게 숨 막히는 작업을 신속하게 마무리해 핫한 뉴스를 경쟁력 있게 내보내려면 미리미리 노벨상 관련 준비를 해야 했다.
 
그 때만 해도 우리의 경우 노벨상 중 문학상에 근접해 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웃 일본의 경우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 ‘오에 겐자부로’ 등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만큼, 우리도 노벨 문학상 수상에 근접해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해서 노벨상 발표 시즌이 되면 생방송이 가능한 중계차를 경기도 수원의 한 작가 집에 배치하곤 했다. 물론 문학 담당 기자는 마이크를 잡을 준비를 완벽하게 갖춰야 했다. ‘미투 사건’으로 지금은 칩거 중인 시인 ‘고은’의 집 이었다. 올해도 영국의 도박사들은 그와 함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중국 작가 ‘찬쉐’, ‘옌렌커’ 등 4 명을 아시아권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군으로 꼽았다.
 
도박사들은 올해도 틀렸다. 올해 노벨 문학상은 탄자니아 국적의 난민 출신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에게 돌아갔다. 수상자 예상 리스트에 없던 작가였다.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뜻밖의 인물들이 선정됐다. 필리핀의 탐사보도기자 ‘마리아 레사’,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자를 ‘기레기’라고 폄훼하고 개그맨 유재석 씨가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2위를 차지하는 우리 현실에서 언론인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는 뉴스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노벨위원회는 “민주주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전제 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대해 상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선정 경위를 밝혔다. 두 언론인의 노벨상 수상으로 필리핀, 러시아는 언론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억압하는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음은 물론이다.
 
‘마리아 레사’는 온라인 뉴스매체 ‘래플러’를 설립해 두테르테 정부를 비판하는 보도를 해오다 명예훼손소송을 당해 재판을 받고 있다. 두테르테는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반인륜적 범죄와 살인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가 집권한 뒤 언론인 12명이 살해당했지만 두테르테는 기자들이 부패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드미트리 무라토프’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정부 성향 신문인 ‘노비아 가제타’를 설립해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푸틴 대통령을 비판하는 보도를 해 왔고 각종 비리를 파헤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여섯 명의 기자가 살해당했다. 그는 “온갖 살해 위협과 협박에도 신문의 독립성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노벨위원회는 평가했다.
 
표현의 자유가 우리에게도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인격권을 침해한 사례에 대해선 징벌적손해배상제를 적용할 수 있도록 언론중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등 야당은 ‘언론재갈법’이라며 반대한다. 언론단체들은 자율 규제에 맡겨 달라고 요구한다. 여야는 언론중재법과 함께 방송법, 신문법 등 미디어 제도 전반에 대해 국회특위에서 연말까지 논의한다는 선에서 법안 처리를 미루기로 합의했다.
 
예상됐던 여야의 충돌은 피했고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됐지만 타협의 범위가 언론 관련 입법 전반으로 넓혀져 중요성은 훨씬 커졌다. 그만큼 해법도 복잡해졌다. 부탁하건대 정치권이 당리당략이나 단견으로 접근해선 안 될 일이다. 사회적 공기, 제4부로서 언론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벨상 이야기를 하다 논의가 여기까지 미쳤다. 가을이 깊어가는 모양이다. 
 

[송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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