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 ⓒ데일리굿뉴스
1597년 9월 15일 진도 앞 바다인 울돌목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은 단 열두 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가진 일본군과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조선 수군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이미 수군 장수 중 한 명은 전장의 불리함을 보고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오기병법의 경구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를 인용하며 엄하게 권고했다.

드디어 다음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죽음을 각오한 전술과 기세로 인해 임전했다. 놀랍게도 전투는 조선군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이 전투가 바로 열두 척의 배로 일본군의 수군장군 구루시마를 죽이고 적의 병선 31척이 격파하여 패퇴시킨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두 명의 전사자와 세 명의 경상자에 불과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를 앞두고 했던 ‘사즉생 생즉사’의 명령은 불가능한 전쟁이라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이 아니다. 미리 질 것으로 생각하고 겁먹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이 전투에서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병사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즉생의 ‘사’와 ‘생’의 주어가 다르고, 생즉사의 ‘생’과 ‘사’의 주어가 다르다. 그들이 죽어야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살고, 그들이 살면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죽는다는 의미다.

비록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위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명령은 복음의 진리에 닿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자는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는 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부활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 바로 죽음이다. 십자가의 진리는 죽음과 부활이다.

죽도록 노력하는 것도, 죽을 각오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살고자 더 치열하게 애쓰는 모습이다. 우리는 죽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국 평생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내 물질을 포기하는 것도,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물론 때때로 양보와 포기를 선택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행동의 동기에는 ‘하나님께서 더 크게 채워주시겠지’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더 잘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셨고, 가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존귀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서 스데반이 죽었다. 빌립·베드로·바울도 죽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했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죽음을 생각하자. 죽음을 실천하자. 말로만 하는 죽음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했던 초대교회의 나눔이, 바울을 높여 주었던 바나바의 섬김이, 환난과 핍박에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바울의 결단을 실천해야 한다.

적당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남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자. 우리가 살기를 포기하고 죽을 때, 신음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교계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영훈 위임목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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