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테레사 선교사 기자2017-09-21

돌이켜보면 이 칼럼을 쓸 때마다 한반도의 정세는 늘 좋지 않다. 기분 좋은 내용으로 칼럼을 쓰고 싶건만 해마다 허락되지 않는다. 분단국가에서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는 걸까. 혹자는 햇볕정책의 결과가 북한의 핵무기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9년간의 압박정치가 이루어낸 결과는 어떠한가?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한지가 언제부터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이 해오는 행태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국제관계와 한국의 정치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를까?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인가? 북한의 정치적 생리현상이요 생존전략임은 나온 답 아니던가. 필자가 북한에서 가장 왕성한 10대 시절을 보냈던 80년대부터 90년 초까지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북한 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의 1%만 풀어도 북한주민들 모두가 쌀밥에 고기를 먹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미국 놈들이랑 한번은 붙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한번 붙어서 끝장을 볼 때까지 좀 어렵더라도 허리띠를 조이고 살아야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다가 탈북하기 이전 20대 초반의 90년 중반 이후는 좀 다른 뉘앙스의 수군거림들을 들었었다. "아이고! 죽든지 살든지 그냥 한번 확 붙어버리지. 이렇게 굶어 죽으나 전쟁이 나서 죽으나 매 한가지지.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 기다리라는 거냐?" 이 아우성의 본질을 아시겠는가? 이미 북한주민들도 북한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의 액수를 가늠은 하지 못해도 어마어마한 재정이 투자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쟁을 해서 결판을 보든지 아니면 그 돈을 좀 풀던지 하라는 것이다. 늘 필자는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평가할 때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선'이고 비 그리스도인은 '악'라는 관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계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논점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기독교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태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완전히 세속주의 관점에 꽉 잡혀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더 비상식적인 행동과 언어를 쏟아내는 것을 볼 때가 많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세상에 속한 이들이 노리는 술수는 뻔하다. 분단고착화로 인해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는 한 북한과의 문제, 한반도 통일과 국제정세에 대한 문제는 철저히 '영적인 문제'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최순실 사건의 뿌리가 드러났다고 쾌재를 부릴 때가 아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악의 잔재들이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려고 발악하고 있다. 그래서 남북정권과 주변 국가들의 정권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는 것이 절실하다. 하나님께 '전쟁 나지 않게 해주세요. 평화를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다. 이런 기도는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저런 기도를 하는 이들의 다수는 자신과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안다면 분단국가에 사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간주하고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교회를 이루는 기독교인들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어 언행일치의 삶을 살 때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나라는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한반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기 때문이며 회개를 까먹은 화인 맞은 양심, 애통함을 잃어버린 무딘 심장과 영혼 없는 신앙놀이 때문임을 통절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김명전 기자2017-09-27

새 정부의 소득주도성장(income-led growth)정책에 대한 비판이 무성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은 폴란드경제학자 미하우 카레츠키(Michal Kalecki)가 1933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경기변동론'에서 주장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항'의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소비진작을 통해 경기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진작을 위해서는 소득의 증가가 중요한 요인이므로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임금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 니콜라스칼도어(Nicholas Kaldor) 등에 의해 진보적인 경제이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 이론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을 제기하면서부터다. 임금주도성장은 국민소득 중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나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면 소비가 늘어나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이미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반가운 일이다.하지만 취업 준비자들을 실업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인건비의 부담이 높아지면 신규인력의 고용을 기피한다. 구조조정 등을 명분으로 기존의 인력까지 감축하려 든다. 실제로 특정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소득배분율이 높으면 사회 계층별로 소득이 고르게 배분되지 않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지니계수다. 소득의 분배 상황을 보여주는 지니계수가 상승해 나빠지는 것으로 집계된다. 일자리를 잡지 못한 구직자들이 더 궁핍해 진다. 실업률이 높아져 소득이 사회 저변에 고르게 나눠 지지 못한다는 의미다. 한국 민주화 절정기인 87년 이후 사례에서 확인된다. 1988년 노태우 정부 5년과 1993 김영삼 정부 첫해까지 6년 동안 임금상승률이 연평균은 20% 수준이었다.사업장 곳곳에 노조가 결성되고 억눌렸던 분배 요구가 봇물처럼 터지면서 일이다. 상당 수 기업이 도산의 위기에 몰렸다.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엑소더스 코리아 행렬이 이어졌다. 한국기업의 위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중국진출의 시작이다. 한국노동시장의 고임금 부담을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세제 등 각종 혜택이 덜어주었다. 섬유,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선두에서 중국 투자를 주도했다. 지금은 자동차, 반도체 등 기술집약적인 산업분야가 중국 등 해외투자로 생존의 활로를 찾고 있다. 해외투자가 2010년 이후 연평균 300억 달러(3조3천억 원)규모를 넘고 있다. 한국기업의 해외탈출 배경이자 현주소이다. J노믹스를 우리기업들은 80년대 후반 경제 민주화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인상, 임금조정 없는 근로시간 단축 등 저소득 계층을 배려하는 각종 정책이 주는 압박감 때문이다. 일부 경제학자들도 소득주도성장은 저성장문제를 극복하는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장기적으로 성장률의 0%대 추락까지 경고한다. 또한 공급측면을 무시한 반 쪽짜리 성장론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근거는 있지만 이 같은 주장에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경제상황과 현재는 다르다. 경제일반론으로 진단하면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한국의 소득불균형수준은 응급처방을 내려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수요부족, 저성장 국면에서 무작정 공급을 늘릴 수만은 없다. 수출주도형 한국경제는 이미 소비재 중심에서 중간재나 반도체와 같은 기술집약형 중심으로 바뀌었다. 또한 세계경제의 패턴이 기본부터 바뀌고 있다. 혁신은 불가피하다. 디지털시대의 미래는 누구도 그 변화를 가늠할 수 없다. 과거의 이론만으로 진화하는 현재를 정확히 분석하기란 불가능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결과는 보정하는 일이다. 여유를 갖고 견고하게 초석을 다시 쌓는 초심이 그것이다. 그것만이 미래의 불확실성 위기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장치다. 소득주도성장정책도 그렇다. 응급처방도 필요하다. 하지만 장기적 성장전략과 국가비전에 대한 경제 주체간의 공감과 합의가 중요하다.

여주봉 목사 기자2017-10-11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그 일에 동참한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신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제까지 2번까지 살펴보았고, 이제 3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시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보이시면, 우리는 기꺼이 삶을 조정하여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의 뜻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에 나는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인 자세”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일”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행하고 마치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아셨습니다(요 4:34). 예수님은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면 어떠한 대가나 희생이나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분의 그러한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오늘날 적지 않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자기 교회의 숫자적인 부흥이나 자기 사역의 확장 외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다. 그러한 자세로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아버지의 일에 동참할 것이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반드시 그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주된 단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려면 교회가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의 자세가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을 아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또 하나 교회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그것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시스템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에는 이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안디옥 교회의 예이다.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안수하여 보낸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이다. 사도행전 13:3의 주어는 3인칭 복수인데, 그들은 안디옥 교회를 가리킨다. 이것을 보면,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고(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음), 안디옥 교회 전체가 그 하나님의 인도를 분별하여 순종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 만약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깨닫고 그것을 분별하여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참으로 심각했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그 엄청난 선교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오늘날도 교회 안에 그러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 교회가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명령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실제 교회의 삶은 그 믿음을 반영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고(사 55:8),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고전 2:9-10)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회나 로터리 클럽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 즉,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개인들의 의견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한다. 만약 그렇게 결정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말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신 1:1-38). 참고로 요단출판사에서 나온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란 책이 이 부분을 잘 다루고 있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7-10-10

지난번에 소개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의 '청년의 교회·종교에 대한 의식 조사'에서는 청년들의 현실과 이에 대한 의식도 알 수 있었다. 청년들의 현실 이 조사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사항에 대하여 가장 많은 30.0%가 '돈'이라 고 응답하였고, 다음으로 20.8%가 '친구'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가장 큰 고민에 대해서는 '취업'(53.7%)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음으로 '돈(생계)'(22.1%)이라는 응답이 많이 나와서 결국 경제 문제가 청년들의 고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도 '복지'(26.8%)보다도 '취업'(43.0%)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것은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을 생각할 때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경제 문제가 청년 문제에서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의 활동에 가장 큰 걸림이 되는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청년층 취업자 수는 1990년대 이후 지속적인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청년 고용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고, 최고수준인 네덜란드와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실업률이 우리보다 높은 미국, 일본도 청년 고용률은 우리보다 훨씬 높다. 통계청은 2015년 4월 기준으로 15~29세 실업률이 10.2%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역대 최고치이다. 또한 전체 실업자 중에서 20대의 비중은 40%에 육박한다. 이와 함께 니트족도 100만 명을 넘어섰다. 니트(NEET)족이란 영어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약자로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가 없는 청년 무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영국 정부가 1999년 처음 사용한 말이다. 공식 실업자에다가 구직단념자, 취업준비자, 그냥 쉬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면 ‘사실상 백수’는 공식 실업자의 3배를 넘고 청년 실업률은 20%를 웃도는 수준이다. 이러한 청년들의 경제 문제는 단순히 청년들의 빈곤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문제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실업으로 인한 자신감 결여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범죄나 자살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최근 10여 년 가까이 우리나라 10~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경제적 불안정과 취업 준비로 인해 혼인율과 출산율을 저하시키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저 수준인 출산율이 더 떨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년 실업 문제는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고통과 긴장을 주며 강력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교회의 역할은? 이러한 경제적인 제약은 청년들의 사회 활동을 위축시키고 이것은 사회 자본의 쇠퇴를 가져온다. 사회 자본이란 협력 행위를 촉진해 사회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 조직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회학자인 퍼트남은 사회 자본은 생산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 준다고 말한다. 곧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많은 것을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압박은 사회적 참여를 약화시킨다. 퍼트남은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저소득층은 잘 사는 사람들에 비해 모든 형태의 사회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훨씬 덜 참여한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 자본의 쇠퇴는 청년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까지도 위축시킴으로써 악순환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종교가 청년들의 삶, 특히 고민 해결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응답(30.3%)보다 부정적인 응답(38.8%)이 많이 나와서 종교가 큰 도움을 준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도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해결은 되지 않지만 마음의 위로를 준다'(56.0%)는 응답이 절반을 웃돌았고 '물질적, 인적 도움을 준다'(3.6%)는 응답은 매우 낮게 나와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종교가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23.8%)를 포함해서 많다는 응답이 66.0%를 차지했는데, 여기서 영향이 있는 부분을 묻는 질문에 '문화'(24.3%)라는 응답이 가장 많이 나온 반면에 '경제'(1.4%)는 가장 낮게 나왔다. 현실적으로 종교가 경제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별로 없다고 본 것이다.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개신교인들의 종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매우 중요한 논제를 발전시켰지만, 오늘날의 한국 청년들은 종교가 경제 발전이나 경제 윤리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로 '개인에 대한 위로를 한다'(27.4%)보다 '사회구조 개혁을 위한 참여를 유도한다'(42.1%)를 가장 많이 꼽아 종교가 현실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는 교회에서도 이러한 청년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현실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교회 안에서 사회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지만, 현실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문제이니만큼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기독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이 사회가 노동자에 대한 법은 가지고 있지만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이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소박한 생각으로부터 출발해 결국 새로운 역사의 물꼬를 텄다. 이와 같이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대안을 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 대안 경제 운동 청년들의 경제 문제는 전세계적인 경제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고, 일시적인 경기 회복에 의해 완화될 성격의 것이 아닌 만큼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취업난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학벌 과잉으로 이른바 ‘스펙’은 더 화려해졌지만, 그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교도 윤리에서와 같은 직업 소명 의식의 부재가 우리 사회 경제 문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한편에서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많은 중소기업에서는 구인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일자리는 있는데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근로 환경이 좋지 않은 이른바 3D 업종에서는 언제나 구직난이 아니라 구인난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일하기 쉽고 보수가 좋은 직종으로만 몰리는 까닭이다. 2012년에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취업이 힘든 이유에 대해 대학생들의 31.7%는 “일자리 부족”이라고 응답했지만, 4명 중 1명은 “대기업 선호 경향 때문”이라고 응답하였다. 대학생들 스스로도 취업에 대한 눈이 높기 때문에 취업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문 조사에 의하면 젊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보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에 대한 기여나 명예, 심지어는 적성보다도 월급이 많은 회사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직업관을 단편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작은 일이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의미 있게 여기고 충실히 일하는 직업의식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시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본주의 4.0’과 관련된 논의들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4.0에서는 정부가 간섭하지만 않으면 효율적인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가정은 정치선전의 형태로 타락했다고 보고, 시장근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것이 오히려 위기를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4.0과 관련한 사회적 경제나 공동체 자본주의와 같은 대안 경제 활동에 교회도 관심을 갖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대안 경제 운동을 통해 현재 자본주의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을 사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 청년들이라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자신의 인생을 계획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기독 청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문제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데 한 알의 밀알처럼 쓰임 받기를 소망한다.

김은호 목사 기자2017-10-13

산 속에 숨어 지내며 살았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김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압제와 노략이 시작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읍에 거하며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피하여 들어가 웅덩이를 파고 굴과 산성을 만들고 그곳에서 숨어 지냈습니다.(사사기 6장 2절)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하여 숨어 지내는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하고 죄 가운데 거하면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항상 피하며 유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니 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지내지는 않을 지라도 항상 심리적으로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빛 가운데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지 않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갑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남보다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사람의 얼굴을 피하여 숨어 살지는 않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숨어 지내며 심리적으로 쫓기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아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려면 말씀대로 순종하며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궁핍함이 심하였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범죄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심으로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의 궁핍함이 심하게 되었습니까? 미디안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토지 소산을 멸하여서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심한 궁핍함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반복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궁핍함을 가져다 줍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의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쫓겨났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왜 탕자가 먼 나라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며 궁핍함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왜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 지금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궁핍함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 죄를 끊어버리고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우리들이 궁핍함 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부르짖음과 응답 이렇게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산 속에 숨어 지내며 궁핍함이 심하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까?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숨어 지내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입니다.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하여졌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사방으로 욱여싸임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음은 오늘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면 내가 살수 없다는 간절함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곧 바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이 아니라 이름도 나와 있지 않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왜 한 선지자를 보내셨는가?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사사기 6장 8절)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그 종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당신의 백성에게 제일 먼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했다” “내가 너를 사탄의 압제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던 너희를 구원하여 내었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한 선지자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원주민을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 그 이후 가나안 땅에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 이후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구원의 은혜에 감격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책망도 달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두려움 가운데 처하게 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사사기 6장 10절)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좀더 안정적으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그 땅의 신들을 섬겼는데 도리어 두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사를 먼저 보내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의 죄를 책망하셨습니까?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깨닫는 자만이 깨닫고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하여 그 죄를 짓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사 기드온을 세워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연약하여 반복적으로 그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며 돌이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지는 횟수보다 깨달음을 주시고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횟수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왜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한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징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시면서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징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큽니다. 내가 받는 징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큽니다.

이효상 원장 기자2017-09-27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언문’,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15세기에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에 19세기 근대에 사용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을 오늘날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글자의 모습으로 만들고,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른 이가 바로 학자 주시경 선생이다. 주시경(1876~1914) 선생은 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평생을 글공부에 바친 가난한 선비 주학원(周鶴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때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뒤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예배에 참석하며 기독교를 접하였다. 한편 한글로 된 기독교문서 보급과 학생들의 자립정신을 키우기 위해 배재학당 내에 마련된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에서 시간제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인쇄된 각종 기독교서적 및 교회정기간행물과 신문들은 그의 교열ㆍ수정 작업을 거치며, 기독교신앙에 보다 가까이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서재필ㆍ윤치호 등이 주도하던 독립협회 회원 겸 기관지인 독립신문 회계 겸 교보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신문의 제작에 참여하면서부터 국문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국문 표기의 통일을 해결하기 위해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국문 연구에 진력하여 쉬운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만들게 된다. 이때 주시경은 "자국(自國)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도(道)는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도는 국어와 국문을 숭용(崇用)함이 최요(最要)하다"고 주장하면서 국어 국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00년 그는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세례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생활하면서, 1889년 설립된 최초의 여성병원인 정동 보구여관에 간호원 양성학교 교사 겸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1902년에는 정동교회 월은청년회 인제국장 등 임원으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선교사업에 깊이 참여하였다. 1904년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하면서 그는 한글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당시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회에는 전덕기를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결집해 있었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을 교육이념으로 상동청년학원(설립자 전덕기, 초대교장 이승만)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 청년학원 설립 당시부터 교사로 봉직하였고, 이후 전덕기 목사와 시작된 교분은 그의 별세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무렵 소외계층인 민중과 민족에 대한 관심이 한글계몽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심화되었다. 1907년 학부(學府) 안에 세워진 국문연구소의 주임위원으로서 국어에 대한 연구 활동과 함께 개인적으로 국어 강습소를 열어 대중 계몽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한문 폐지와 함께 국문 글쓰기를 대중적으로 확대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뒤에 최현배(崔鉉培)·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렬모(鄭烈模)·장지영(張志暎)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식민지 시대 '조선어학회'의 국어국문 연구에 기초가 되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반대해 1921년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조선어 학회’가 만들어진다. 장지영, 김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인《한글》을 만들고《조선어 사전》편찬을 시작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극렬한 탄압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데일리굿뉴스 주시경 선생은 1906년 '대한국어문법', 1908년 '국어문전음학', 1909년 '국문연구' 등을 펴내며 국어의 문법체계를 근대 언어학의 방법과 관점에서 확립한 '1910년 ‘국어문법(國語文法)'을 발간하게 된다. 중국의 한문이나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한자어를 배격하고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국어'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표제가 '조선어(朝鮮語)문법'(1911)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한글 연구는 후학들에게 이어져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주시경 선생의 1910년 박문서관에서 발간한 ‘국어문법(國語文法)'이나 1914년 신문관에서 간행된 ‘말의소리’는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특히 근대 언어학의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았다는 것은 매우 한글보급에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별세할 때까지 상동청년학원,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런 주시경 선생의 선구자적인 한글사랑과 사회 계몽운동의 밑바탕에는 신앙심과 더불어 실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있어 한글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였고 나라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방인성 목사 기자2017-09-26

북한이 지난 9월 3일 6차 핵실험과 9월 15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번 미사일은 고도 약 770여㎞, 비행거리 약 3700여㎞로 미국령 괌을 통과하는 거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괌 주둔 미군의 방공 요격 망을 무력화 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은 큰 상처를 입었고 한국은 양쪽에 끼어 힘들어 하고 있다. 북한은 안보리 제재로 경제적 압박을 받으면서도 축제 분위기다. 한국갤럽이 북한 6차 핵실험의 한반도 평화 위협 정도를 물은 결과 '76%가 위협적'이고 '20%는 위협적이지 않고 4%는 의견을 유보'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물은 결과 '37%가 가능성 있다'고 답했고 '58%는 별로 가능성이 없고, 6%는 의견을 유보'했다. 여론조사는 핵이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는 어렵다는 오랜 분단과 국제정세를 통해 직감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만큼 우리에게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없기에 누구나 원한다. 그러나 참 평화에 이르는 길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 훼퍼는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라며 험난하고 긴장이 있음을 말했다. 평화는 정치적 협상, 경제 지원, 문화 교류는 물론 종교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상황에서 휴전 상태 즉 전쟁억제만으로 평화가 유지 된다고 볼 수 없다. 이념대립과 사회 갖가지 갈등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분단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의 반 평화 세력은 폭력으로 위협하고 분단을 고착시켜 권력유지에 몰두하는 양쪽의 세력이다. 그러나 양비론으로 양쪽 다 비난만 하기에는 72년 분단의 세월이 너무 길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핵이 존재하는 불행한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 어리석은 싸움으로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으르렁 거리며 자존심을 건드리는 무분별한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다. 현실을 겸허히 직시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길로 가기 위해 조건 없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대화의 길이 평화에 이르는 첫 발걸음이다. 미국에도 북과 대화 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우리도 북과 조건 없는 대화를 하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나는 대화를 통한 평화의 힘이 남북을 하나로, 더 나아가 비핵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핵보다 무서운 것은 증오와 불신이다. 그러나 핵보다 강한 것은 평화의 힘이다. 이런 긴박함 속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800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결단과 통일부의 발표에 박수를 보낸다. 러시아를 방문한 문대통령은 나진-핫산 공단 건설을 남과 북, 러시아가 협력하기로 합의 했다는 것도 평화로 가는 길이며 꽉 막힌 경제를 여는 것이다. 이렇게 다각도로 평화를 이루는 길을 찾아야 남과 북이 대화하면서 함께 번영의 길로 갈 수 있다.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활발한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하고 각종 문화, 체육 교류를 위해 힘써야 한다. 정치권에만 맡기면 권력을 위해 서로의 체제만 고집하게 된다. 이제 양쪽 체제는 대안을 찾아야 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 핵으로 벼랑 끝 전술을 펴는 북은 체제보장도 시급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 교류 없이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남쪽도 신 자유경제체제의 폐단으로 심각한 양극화와 청년실업의 병을 앓고 있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의 양대 강국의 패권을 위한 싸움에 휘둘리지 말고 제 3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 9년간 꽉 막힌 남북 관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북의 방문과 지원을 통한 나의 경험은 무한한 잠재력이 남과 북에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의 장점을 합쳐 새로운 경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평화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마련 할 수도 있다. 물론 70년이 넘는 분단을 뛰어 넘어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가능하고 해야만 하는 것은 이대로는 공멸만이 있기 때문이다. 틱낫한은 "폭력은 두려움과 절망, 외로움의 표현이다." "화가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평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로마의 힘과 부의 평화가 거짓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그의 삶이 참 평화임을 보여주셨다. 원수사랑은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핵 위기로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의 위기는 곧 협상으로 갈 수도 있다. 평화의 길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열려있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7-09-08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한 공원에 앉아 있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 '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사람과 쾅 하고 부딪힌다. 시각장애인이 화를 내며 말한다. '당신은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자 길 가던 자가 말한다. '나는 바로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있는 사람이오' 모든 철학과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목적을 알아야 고난도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공부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생기면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도 물리치고, 놀고 싶은 유혹도 이길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목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목적을 다른 말로 하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가수,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최고 인기의 자리에 오르는 연예인들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살로 인생을 끝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뭐가 아쉬워서 자살하느냐고 말한다. 세상의 목적은 다 그렇다.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갈 때는 힘든 줄도 모른다. 옆도 보지 않고 뒤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기쁨과 감격이 오래 가지 않는다. 허무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을 얻으려고 내 인생을 다 바쳤단 말인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할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면 죽음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나' 라는 것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박사라도, 생물학 박사라도,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사람이라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답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사후에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최고의 존재이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을 보면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 로마서 6장 22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로마서 8장 14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나의 영적 아버지이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을 자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을 보면 나는 빛의 아들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낫 놓고 기역을 모르고, 지게 놓고 A를 모르는 할머니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렇게 선포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유대인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눅3:15)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정말 그리스도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한이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내가 어떤 존재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엘리야냐 선지자냐 하고 묻자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말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다.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마11:11) '네가 누구냐?' 이 질문에 세례 요한이 확실하게 대답한 것처럼 우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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