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교수 기자2017-08-23

인문학적 성찰과 창의적인 사고 제4차 산업혁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창의적인 사고가 경쟁력의 원천이요, 생존의 무기가 된 시대에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고 지켜야 앞서갈 수 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나 단순 작업은 이미 기계의 몫이 돼 버렸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하는 것이다.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한다는 의미는 세공실에서 원석을 갈아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 듯이 창의적인 사고로 무장할 수 있도록 머리를 훈련하고 단련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석처럼 생각을 세공할 수 있을까? 우선 인문학적 지혜가 담긴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을 통해 훌륭한 사상가나 선각자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분들의 생각을 읽고 공유하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고,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를 생각해본다. 독서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전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이미지다. 말 그대로 그 이미지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다. 보는 정보는 볼 때는 재미있고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휘발성이 굉장히 강해서 바로 증발해 버린다. 이미지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만 맴돌 뿐 창의적으로 되새김돼 체계적인 지식으로 남지가 않는다. 탁월함의 추구와 역사의식 세계적인 테너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는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다. 그런데도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란 명곡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런 노래를 선물하기까지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했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인데도 많은 책을 읽고 소화해냈다. 보첼리의 독서는 보기가 아니라 읽기였고 연마였다. 왜냐하면 그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점자책을 한 자 한 자 공들여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익힌 법학으로 변호사가 됐고, 고전을 접하면서 갖게 된 풍부한 감성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성악가가 되게 했다고 술회했다. 맹인 보첼리가 마음의 눈으로 법과 소리를 읽었듯이 우리는 눈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보석 같은 생각이 샘솟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가와 대화를 하고 그가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다. 책 내용 이면에 숨어있는 맥락을 하나 둘 찾다 보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지식체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지식체계가 보이면 그 책은 나의 지식으로 재구성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바른 판단력을 기를 수 있다. 또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석 같은 생각이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도 선조들의 삶이 녹아있는 사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다. 사서 속에는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책 속의 역사적 인물들의 삶은 문학적이면서 교훈이 되는 철학적 내용이 가미된 서사로 넘쳐난다. 더욱이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를 지배하던 철학을 찾을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역사의식이란 어떤 사회의 현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력이라고 돼 있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하나하나 끊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 앞뒤 맥락을 살펴서 단단한 논리를 구성해낼 수 있다. 인문학적 지혜와 4차 산업혁명 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때 우리의 당면한 현실 문제들을 풀어내는 지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뉴스나 신문기사에서 5G나 4차 산업혁명 또는 코딩교육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생소한 말은 우리의 일상과는 무관한 이슈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 속에는 인류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내포돼 있다. 변화에 지혜롭게 동참할 힌트가 담겨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술 혁신을 통해 많은 일을 빨리 하고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생활의 여유와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 문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들이 인간의 사고능력을 쇠퇴시킨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 합리적인 비판적 사고는 사라지고 개인과 개인 간에 헐뜯고 비난하고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집단과 집단 간의 편 가르기와 적대감이 넘쳐나고 있다. 왜냐하면 온갖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수많은 파편적 정보를 정밀한 검증 없이 실시간으로 배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같은 흐름이 바람직한 현상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한다. 그렇다고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 자체를 비난하거나 시대를 과거로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한 제4차 산업혁명의 혜택은 누려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필요한 창의적인 사고의 능력을 키우려면 원석을 보석으로 연마하듯 사고의 근육부터 단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지혜가 담긴 책을 많이 읽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주변사람들과 돌려 보며 토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제 지성은 특권이 아니라 값있게 써야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눈,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 성경을 비롯한 고전 속에 있다. 그래서 제4차 산업혁명이 나아갈 방향과 문제점의 극복 방안을 인문학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영훈 목사 기자2017-08-14

최근 우리 사회에 우울증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울증이란 감정, 생각, 신체 상태, 행동 등에 의욕 저하와 우울감이 심해져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질환을 말한다. 우울증은 임상적 우울증, 기분 저하증, 산후 우울증, 계절성 우울증, 고기능 우울증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다. 소위 '다포 세대', '헬조선', '흙수저' 등의 자조감이 섞인 신조어는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우울감을 대변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더욱 걱정되는 점은 이러한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해 쫓아내야 하는데, 그대로 방치해서 병을 키우는 경우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들도 뉴스를 통해 종종 보도되고 있으며, 유명 연예인이 우울증을 이유로 마약류에 손을 댔다가 적발되는 사건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울증을 쫓아낼 수 있을까?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우울증을 대적해야 한다. 부정적인 사고와 언행은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되는 걱정과 근심이 반복되면 될수록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게 되는 것이다. 걱정과 근심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서도 걱정하게 되고,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의욕 저하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들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한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들도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절대 긍정의 믿음을 선포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나가게 될 것이다. 둘째, 절대 감사의 믿음으로 우울증을 대적해야 한다. 환경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선택은 원망 불평하며 그 스트레스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긍정과 감사의 고백으로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것이다. 문제가 닥쳤을 때 원망 불평하는 것은 누구나 선택하기 쉬운 일이지만, 원망 불평하는 것은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도리어 원망 불평은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원망 불평으로 인도해간다. 그러나 감사의 고백은 우리의 삶을 깊은 절망에서 끌어내는 힘이 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감사는 우리가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긍정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매일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울감과 무력함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우울증을 대적해야 한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까지도 이겨내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랑에는 위대한 생명과 힘이 있다. 우리의 상황이 어렵고 절망스러울수록 사랑을 실천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을 나눌 때 사랑을 받는 사람도 생명과 힘을 받지만 사랑을 전하는 사람도 동일한 생명과 힘을 받게 된다. 사랑 나눔의 실천을 통해 얻는 보람과 감사의 마음은 우울증으로 인해 잃어버린 삶의 목적을 다시금 일깨워줄 것이다. 우리나라에 우울증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사회 풍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없고, 부정적인 사고들로 마음이 채워지게 된다. 더불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의 나눔 역시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악순환 되는 우울증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다시 한 번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함으로 우리 사회에 가득 찬 우울감을 떨쳐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주봉 목사 기자2017-08-16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그 일에 동참한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신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성경적인 사역에서 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계시하신다는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 조명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영적으로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매우 잘 요약하고 있다. (1) 하나님 자신. (2) 하나님의 목적. (3) 하나님의 방법 혹은 길.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말은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 목적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성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우리는 출애굽기 3장에서 이에 대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아브라함 때부터 보이신 대로 그들을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모세를 부르시기 위에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하나님 자신(6, 14절)과 하나님의 목적(7-9절)과 하나님의 길(16-22)을 계시하셨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역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사역을 감당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주도권을 잡고 앞서 가고 계셔야 한다. 당연히 하나님은 주권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온 세계 가운데서 주도권을 잡고 일하고 계신다. 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주도권을 잡고 앞서 행하고 계셔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다윗, 바울, 베드로 등 모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삶 속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도권을 잡고 앞서 가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혀 움직이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삶 속에 현재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앞서 가고 있는가? 당신 교회의 삶 속에 현재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앞서 가고 있는가? 만약 당신의 삶이나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앞서 가고 계시지 않다면, 더욱 주님을 찾아야 한다. 더욱 집중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 주님을 찾지 않는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특권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우리 가운데서 운행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7-07-31

무종교인의 증가 작년 말에 발표한 인구센서스 종교부문에서 나타난 한 가지 특징은 무종교인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인구센서스에서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국내 인구 비율은 전체의 56.1%로, 종교가 있다고 답한 비율(43.9%)보다 10%p 이상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교 없는 사람이 종교 있는 사람을 추월한 것은 통계청이 종교 유무를 조사하기 시작한 1985년 이후 최초다. 작년 종교 없는 인구는 2005년 2182만 6000명에서 지난해 2749만 9000명으로 9%포인트 급증했다. 나이별로는 20대가 64.9%로 가장 높았고, 이어 10대(62%), 30대(61.6%), 40대(56.8%) 순이었다. 종교 인구 감소 폭은 40대(13.3%p), 20대(12.8%p), 10대(12.5%p)에서 상대적으로 컸다. 이렇게 무종교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조사 방법상 우리 사회에서 가구형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난 인구센서스 인구 부문에서는 우리 사회의 대표 가구가 4인가구가 아닌 1인 가구로 나타났으며, 2인 가구의 비율도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인구센서스 조사에서는 가구의 대표가 응답을 하기 때문에 4인 가구 중심이었을 때 다른 가족의 견해 속에 묻혔을 수도 있는 종교 없는 사람들이 1인 가구나 2인 가구 형태에서는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방법 상의 문제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최근 개신교의 가나안 성도나 가톨릭의 냉담자와 같은 비활동 신자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성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 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불교는 일 년에 한 두 번 절을 찾아도 불교인으로 볼 정도로 종교 수행이 훨씬 더 낮은 수준이다. 이러한 무종교 또는 탈종교인의 증가는 20여년 전부터 미국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어왔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기성 종교에 실망한 사람들이 제도 종교를 떠나 개인적으로 영성을 추구한다는 연구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특히 20대에서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는 것은 취업이 어렵고 삶의 여건이 팍팍한 이들에게 종교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종교인이 많다는 것을 단순히 전도할 대상이 많다는 의미로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종교인가 아닌가 이렇게 무종교인이 많게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인구센서스의 종교 조사가 종교 단체 가입 여부로 종교인을 파악하는 데서 나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서도 다양하게 종교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종교 없는 인구가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중층적 종교인 곧 하나의 종교에 동일시하지 않고 여러 종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 역시 종교인 통계에서는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결과로 전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종교인인 것과는 사뭇 다르게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알려진 한국에서는 오히려 종교인이 50%가 채 안되는 것으로 측정되는 모순된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기존 통계 조사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종교인 또는 종교성 측정 지표의 개발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현대 종교학에서 흔히 인용되는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척도이다”라는 말은 한국 종교를 연구하는 데에도 적용된다.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한국에 왔던 초기 여행자나 선교사들은 한국에는 종교가 없고 미신만이 있을 뿐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종교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연구하는 태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유일신적 종교 사상에 기초한 개념 정의를 가지고 동양의 종교를 평가하게 되면 동양종교는 유일신교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라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교이다.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래된 논쟁이다. 유교는 언뜻 종교처럼 보이지만, 종교의 중요한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인 초월적 존재나 내세관이 매우 빈약하다. 조상신을 섬기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초월신은 아니며, 제사를 잘 지내고 조상신을 잘 섬긴다고 해도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실제로 공자는 “삶의 문제도 모르거늘 하물며 죽음 뒤의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답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1%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교적’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유교적인 가치들을 열거하고 동의하는지를 물었는데 응답자의 90퍼센트 이상이 동의를 한 결과도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종교를 말할 때 유교적 개신교, 유교적 천주교, 유교적 불교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 대부분이 신도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도를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가 참석한 동아시아종교사회학회(홍콩침례대학교에서 개최)에서 한 일본 학자는 이 문제를 다루어 주목을 받았다. 신도는 일본 고유의 민족 신앙으로,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 종교라기보다는 국민 신앙 또는 민속 신앙이라고 말한다. 일본 어느 지역에나 가면 신사가 있고 심지어는 집안에도 신사를 두고 절을 하고 있지만, 종교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학회를 주관한 미국 퍼듀대 펭강 량 교수는 “민속 종교라는 것은 비서구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 민속 종교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는가? 이것은 서구인들이 비서구 사회에 대하여 규정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특정 종교는 없으면서도 일본인 대부분이 신도를 신봉하는 것이 일본에서 선교를 하기 어려운 이유가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신도를 받아들이고 있어서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종교의 의미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종교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 정확하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개신교인이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신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여러 다른 종교의 색채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몇 년 전에 한국갤럽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윤회설이나 해탈설을 믿는 개신교인의 비율이 불교인의 비율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충격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종교들은 모두 지나치게 현세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무릇 종교는 현실 너머의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며 종교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종교들은 한결 같이 현실에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기복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태도 또는 행위의 측면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종교에 호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순히 개신교의 우월함을 주장하기보다 개신교 신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개신교 신앙을 이용하기보다 본래 개신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5백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개신교 전통이 바로 세워지고 각각의 개신교인들이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핵집 목사 기자2017-08-22

필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 위원장으로서 위원 24명과 함께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8일까지 유럽 지역의 평화조약캠페인을 다녀왔다. 이번 유럽 지역 평화조약 캠페인은 작년에 있었던 미국 지역 평화조약 캠페인에 이은 두 번째 캠페인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제10차 총회(2013년)를 부산에서 개최했다. 총회는 중요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이었다. 이 성명서에서 세계교회는 미래로 가는 길- 권고안들을 내어 놓았다. 그 중에 하나가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조약으로 바꾸어 전쟁상태를 종식시킬 폭넓은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내년에 아시아 지역에서 진행될 한반도 평화조약 캠페인은 세계교회와 함께 한반도에서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조약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번 유럽지역에서는 영국 감리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독일의 개신교협의회(EKD)와 헤센나사우 주 교회와 함께 한반도 평화조약의 필요성을 알리고 깊은 논의를 했다. 세계개혁교회연맹(WCRC) 총회가 열렸던 독일의 라이프찌히에서는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 연맹과 함께 성찬식도 나누고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서는 관계자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조약의 필요성을 전 세계교회에 알리는 일을 논의했고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에서는 수사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평화적인 영성을 어떻게 확산 시킬 것인지를 논의했다. 1953년 7월 27일, 3년을 끌어오던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을 맺음으로 전쟁상태를 쉬게 만들었다. 정전협정문 4조 60항에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정전협정 3개월 이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외국군 철수 문제 및 평화적인 해결을 협의하도록 건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전협정 이후에 정치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64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서로의 약속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분단 정전체제는 더욱 심화되고 한반도는 긴장과 불안이 감돌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에 평화적인 통일의 사명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 66조 3항, 대통령 조항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 69조의 대통령 선서문에도 ‘헌법을 준수하고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복무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우리 헌법은 어디를 보아도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 나아가 정치적인 합의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평화통일이 우리 헌법의 정신이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평화조약은 평화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길로 들어서는 관문에 해당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신 한반도 평화 비전’을 선포했다. 이 선언에서 종전과 함께 관련국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체결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평화협정은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7-08-10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는 유명한 가사의 가요가 있다. 나에 대한 자의식은 언제나 '너'라는 그대가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작아지는 나는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나는 절망적이지만, 바다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나는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아지게 만드는 나의 '너', 나의 '그대'는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만 서면 정말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축복이다. 그러면 교만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복이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소유욕이다.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이다. 두 번째는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다.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보이고 싶어하는 본능이다.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 받고 싶어 보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세가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다 아신다. 다 보고 계신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면 이미 자기상을 다 받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은밀하게 하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만약 그 사건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후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갔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선을 행하면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선을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요즘 가장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람은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일 것이다. 그들이 장로 부부라는 것이 얼굴을 화끈하게 한다. 창피해 죽겠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갑질을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서자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 고넬료는 누구인가? 로마의 백부장이다. 장교이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일개 식민지 국가의 어부였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그런 경의를 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때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면서 말한다. '일어나시오. 나도 사람이요.' 그때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10:33절을 함께 읽어보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고넬료의 신앙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어떻게 하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셔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했다.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국경에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윗의 명령으로 언약궤를 옮기다가 그만 웃사가 죽고 만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운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약궤 옮기는 것을 중단하고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을 있게 된다. 오벧에돔이 복을 받자 다윗이 용기를 내어 다시 시도한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매고 옮긴다.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자 다윗은 너무 기뻐 뛰놀며 춤을 추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던지 몸이 드러나도록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체면을 구기고 품위를 잃었다고 왕을 비난한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다윗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체면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달랐다. 사울은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왕이었다. 그런 그가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외치는 백성들의 소리에 맛이 간다. 그날 후로 사울왕은 다윗을 주목한다.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의식해야 할 사람이 인기나 백성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고, 다윗을 의식하였기에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 보다 하나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이다. 우리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 영적인 지도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배현주 교수 기자2017-08-02

올 여름 필자는 에큐메니칼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참석하게 되었다. 참석한 회의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련된 주제가 공통적으로 다루어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발발의 위험이 높아간다는 소문이 회자되는 현실이기에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세계교회의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불편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13년 WCC 부산총회 이후, 한국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콩고, 남수단, 나이지리아, 콜럼비아 등, 심한 내전과 사회적 폭력사태를 겪고 있는 국가들과 함께 WCC가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우선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한반도가 처해있는 길고 지루한 분단과 대결상태 때문이다. 2014년 12월, 스웨덴 지그투나에서 WCC 평화협의회가 열렸다. 지난 세기 유럽사회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신앙운동인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의 창시자 죄더블룸이 1914년에 웁살라 대주교로 취임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스웨덴 교회가 WCC 평화협의회를 유치한 것이었다. 죄더블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하여 ‘삶과 봉사’ 운동을 창설하였고, 이 운동은 훗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출범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존경 받는 교회 지도자로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던 죄더블룸은, 인류가 전쟁 없이 자유와 평화와 정의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적 책임이라고 믿었고, 이를 위한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스웨덴 평화협의회에서는 WCC가 선정한 '우선국가'들을 위해서 어떻게 에큐메니칼 협력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것인지, 긴 시간에 걸친 그룹별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전체 그룹이 참여하는 플레나리 보고시간이 이어졌다. 그 때, 아프리카에서 온 여성 활동가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하였다. 본인이 사역하는 지역은 마실 물과 기초 생필품조차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왜 WCC의 '우선국가'로 지정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WCC가 '우선국가'를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인 셈이었다. 그 순간, 한국인으로서 필자는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극심한 빈곤상태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들을 위해서 나누어야 할 세계교회의 기도와 사랑과 관심을, 이제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한국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엄습하였다. 물론 한반도 평화문제는 세계 평화와 직결되는 만큼, 세계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로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결해야 할 자체적인 과제를 최선을 다해 해결하면서, 세계교회의 우선적 주목과 관심을 요청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일찍이 군사정권 초기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지대함을 자각했던 신앙의 선각자들은 한국교회가 평화와 통일을 자신의 역사적 소명으로 자각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던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자들과는 절대로 대화할 수 없으며,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저들과 맞서야 한다는 입장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모진 탄압을 받아 깊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 북한 피난민들이 주축이 된 교회일수록 공공(恐共)증을 넘어서기 어려웠고, 평화통일이라는 주제를 포용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전후 한국교회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성찰의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채, 어언 6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왔다. 물론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왔다. 무력대결을 지양하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한 교회개혁으로 공산주의를 극복하자는 호소도 있었다. 남과 북의 거시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갈라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겸허한 자기반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자성의 외침도 있었다. 대립과 갈등 속에서 공통성을 발견하고,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 간에 서로를 포용하는 자세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젖은 권위주의적 인격은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는 갈등요소가 되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인격이 양산된다면, 교회가 평화통일의 기반이 되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양극화를 증폭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신앙의 선각자들이 예견했던 영성적·인격적·목회적·사회적 과제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불편한 진실이다. 한국교회는 정부와 국제사회가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일깨우는 예언자적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용서와 일치라는 성서적 가치관이 개인과 공동체적 삶 속에서 체화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남남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문화를 세워가며, 평화통일을 향해 나가는 길에서, 신뢰받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허호익 교수 기자2017-07-25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1948.9.9)에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의 자유를 가진다"(제2장 14조)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의 김일성 역시 다른 공산국가처럼 집권 초기부터 '종교는 아편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도구'라고 여겼다. 8.15 해방 전까지 북한에는 교회가 2600여 개나 있었고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寺刹)이 많았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20년간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의 정책을 시행하여 왔다. 교회당은 소멸하고 가정교회만이 존재해 왔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유명무실하였던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중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이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2년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제4장 54조)라고 수정하였지만,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포함시킴으로써 종교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의 개신교, 천주교, 불교 관계자들이 제3국을 통한 남북 종교인 교류를 이어 왔으며, 이런 배경에서 김일성의 종교관이 크게 달라져 1882년에는 공식적으로 "수령님께서는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적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을 배격하시었지 종교와 종교 신자를 배척하신 일이 없습니다. 종교에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1988년 11월에 평양에 처음으로 봉수교회가 세워졌고, 1988년 9월에는 장충성당이 세워지고, 1992년 12월에는 칠골교회가 준공되었다. 1992년 4월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제5장 68조를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건물을 짖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질서를 헤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라고 개정하였다. 이러한 종교 정책의 변화는 1981년 판 <조선말 사전>과 1992년 판 <현대조선말대사전>의 기독교 관련 용어들의 변화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 정의한 것을 1992년에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변경하였다. 교회를 "반동통치계급이 정치적 비호 밑에 근로자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예수교의 교리와 사상을 선전하여 퍼뜨리는 거점"이라 규정한 것을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을 하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선전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1981년에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예수교를 선전하며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하는 종교의 탈을 쓴 침략의 앞잡이"를 선교사라고 정의한 것은 "기독교를 보급 선전할 사명을 띠고 다른 나라에 파견한 사람"으로 수정하였다. 북한의 경우 실제로는 종교의 자유가 완전 보장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 종교아편설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남북대화와 통일을 향한 큰 장애가 제거된 큰 걸음의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종교를 아편이라 주장하는 북한'에 대적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반공정신으로 신앙을 무장해야 한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문형욱 대표 기자2017-07-25

실패라는 단어는 우리가 듣고 싶지 않는 단어 중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실패'라는 단어가반드시 따라다닌다. 오프라 윈프리는 “실패는 우리가 어떻게 실패에 대처하느냐에 따라 정의된다(Failure is defined by our reaction to it.)”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일까? 내가 이 사람과 잘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왜 헤어지게 하셨을까?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실패를 느낀 후의 반응인 것 같다. 건강하지 않은사람은 이성교제를 할 경우 실패하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쉬울 때에도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말로 상대방을 대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으로 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널 사랑해”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 해놓고선 “내가 널 사랑한다니까. 왜 안 믿는거야!”라고 소리 지르거나 상대방의 말실수 하나에 집착하여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싫어도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것이 힘들어 상대방이 헤어짐을 요구하면 자신을 학대하며 '난루저'라고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건강한 이성교제를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성교제를 실패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이 친구와 해어지게 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마음 속 깊이 고민하고 찾아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연애의 실패를 다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헤어질 수 있도록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루저이기 때문에 실패하도록 놔둔 것이 절대 아니라,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는 것! 하나님은 연애 과정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고 계심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실패하면 마음은 분명 아프다. 하지만 마음이 속상하고 아프다고 해서 루저일 수는 없다. 아픈 마음은 좋은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하고위로하며 치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헤어짐은 때로는 우리에게 더 큰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수 있다. 크리스천 청년들은 단 한 사람도 루저인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모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연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한다.

김영식 목사 기자2017-07-18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쉬운 것이 신뢰다. 지난 9년의 남한 보수 정권을 통해 우리는 남북관계 신뢰가 얼마나 금방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개성 관광이 중단된 것을 시작으로 남북관계 위기는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거쳐 급기야 개성 공단 폐쇄로까지 이어지며 2000년부터 시작된 남북 신뢰 평화 관계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여기에는 4차까지 이어지는 북한의 핵실험을 막아야 한다는 대북 제재와 압박이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보수 정권의 제재와 압박의 대북 관계는 역설적으로 북한의 핵기술 개발이 고도화, 경량화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고, 북한은 최근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ICBM 개발까지 마쳤다고 보고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 문제는 비핵화가 아니라 동결의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로 한국과 미국의 보수정권이 펼쳐온 제재와 처벌의 대북관계는 북핵 실패로 입증되고 있다. 그나마 남북을 잇고 있었던 서해 군 통신선과 판문점 연락사무소 채널마저 작년 2월 끊어버렸기 때문에 긴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남한 정부가 휴대용 확성기를 이용해서 북쪽을 향해 소리쳐 통보한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남북관계의 파탄 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대북 전략적 인내라는 무정책에 일방 편승하며 외교의 주권을 포기했던 결과는 결국 스스로를 G2라는 이익모순의 한복판에 갖다 놓은 사드 배치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엄혹한 한반도 평화 현실의 시계 제로 속에서 신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6일 소위 신 베를린 평화 선언을 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복원을 선언했다. 신 베를린 선언이라 함은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루어냄으로 실제적인 평화정착의 단계를 마련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선언의 핵심은 남북한이 합의했던 6.15와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지난 9년간 중단되었던 한반도 평화정착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자는 매우 원론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북한은 한반도평화 관리의 남한 주도권을 인정한 한미정상 합의가 나온 다음날 보란 듯이 ICBM을 성공시킴으로 북한의 관심은 남북관계에 있지 않고 오로지 미국에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지난 9년간의 남북관계 단절 혹은 무효 경험이 남북 평화 관계의 복원을 주장한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완곡함의 표현이다. 남한을 상대로 관계를 복원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5년 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을 북한이 또 다시 시작하려면 보다 더 획기적이고 분명한 구체적인 제안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군사회담과 적십자 회담의 제안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북한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오롯이 신뢰 회복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펼쳐내는 수밖에 없다. 돌아선 북한의 마음을 되돌리며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것은 더 많은 수고와 인내를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화 시도와 노력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길 바란다. 필요하다면 대북 특사라도 보내야 한다. 집권하자마자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에 보냈던 특사를 가장 가까운 북한에 보내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북한은 남한의 대화 제의에 마음을 열고 만남의 자리로 나오길 바란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남북한의 주도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7월 27일 휴전협정 64주년에 서로에 대한 비방이 멈추고 군사분계선의 긴장 완화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험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통신선이라도 우선 복원하자. 남북한 신뢰 회복은 쉬운 것, 가능한 것부터 천천히 지속적으로 해나가자.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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