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 기자2018-07-1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존재가 된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었다면 전적인 부패 속에서 죄를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변화 시켰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힘들어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죄의 유혹에 수 없이 넘어집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 하루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인식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활동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죄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단의 유혹은 집요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삶의 전 방위적으로 공격함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흔들어 놓고 무너뜨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의 은혜를 만끽하면서 죄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주님이 이제 되었다는 사인(sign)이 있을 때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은 철저하게 영적입니다. 영적 전쟁이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전쟁은 복합적입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이면서 세계관의 전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반복적으로 만납니다. 삶의 매 순간이 죄와 세계관의 충돌입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성경의 방식으로 살 것 인지 끊임없는 전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의와 거룩함과 선의 자리에 있으려는 전쟁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이 모든 삶을 성화 즉 거룩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더욱 힘써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거룩함을 살 수가 없습니다. 혹 세상에서 착한 모습으로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면 공로 신앙에 머물게 되고, 영적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거룩해짐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철저하게 성령을 의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강력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영적인 타락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서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났어도 끝까지 성령을 의존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양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 길로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능적으로 그 길을 갑니다. 자기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본능에 순종하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가신 그 길을 한 걸음씩 따라 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거룩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거룩함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성화의 길은 긴 여정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성화의 여정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모습에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질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함의 자리로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화를 향한 투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신동식 목사 기자2018-06-11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흔적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울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렇듯 흔적은 역사를 보여주고,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흔적에서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흔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때 소아시아와 헬라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또 소아시아와 헬라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사도들이 가기 전에 복음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 후에 사도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선교사로 보냄을 받습니다. 땅끝까지 가라는 말씀을 따라 사도들은 복음을 들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에베소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빌라델비아·사데·두아디라·서머나·버가모교회 등이 터키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도시와 교회 터는 흔적만 있습니다. 골로새나. 서머나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데교회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 뒤에 허름한 작은 교회터로 흔적만 있습니다. 바울의 여정은 드고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오라는 말씀에 따라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지 않고 바다를 건너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 압비볼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주 장사 루디아를 첫 회심자로 얻습니다. 이렇게 유럽에 첫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압비볼리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피신합니다. 카산더 장군이 창건한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의 3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활력이 있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는 아주 조용한 도시입니다. 그 곳에서 말씀에 신실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베뢰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터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존재했던 유대인 회당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베뢰아를 지나서 아테네로 가고 고린도를 거쳐서 다시 가이샤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계속해 제자들을 돌아보다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바울의 여정을 따라가면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물어진 건물만 유물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의 무상함도 아닙니다. 그 흔적에서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바울과 제자들은 당시의 세계에서 맡겨진 최선을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고 떠났습니다. 지금은 이슬람 국가가 되어서 마음껏 예배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지만 흔적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찾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금 교회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핍박과 고난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자 몸부림쳤던 선진들의 모습을 떠오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봅니다. 복음은 교회를 통해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교회의 흔적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흔적이 있습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형체도 알 수 없지만 복음을 듣고 찬양하며 함께 모여 기도하고 사랑을 나눴던 옛 성도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를 봅니다. 이 교회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교회를 존속시키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 기자2018-07-29

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살펴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지금 한국교회에 제시하고 계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 교회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이다. 신약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 그것이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을 위해서도 성령의 조명이 필수이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성령님이 없이 가능한 것이 단 하나가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삶,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삶도 당연히 성령의 조명이 필수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교리적인 고백도 아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려면,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속에 우리가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갈 어떠한 선한 것도 없는 것이 선명히 보여져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이 선명히 보여져야 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의(자기 의 혹은 육체를 의지하는 것)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내가 아는 귀한 목사 사모의 예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그 부부에게 육체를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삶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셨다. 그 당시 어느 날 그 사모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들이 반복적으로 비쳐지면서, 심지어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절망 가운데서 온 천지가 깜깜하게 느껴졌다. 예배당에 앉아서 새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를 영어 가사로 부르고 있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 영어 가사에는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주님을 보아요.”라는 내용이 있다. 그 가사를 부르고 있을 때 마치 깜깜한 터널 속에서 빛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는 구절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마치 “네 속에 선한 것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길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러니까 내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없다고 하지 않더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때 그 사모에게 선명하게 깨달아졌다. “아, 내 속에 아무런 선한 것도 없구나. 그러니까 예수님이 길이시구나.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구나.” 이어서 그 사모의 입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양이 터져 나왔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의였다. 그것이 정확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면서, 소위 개혁주의 신앙을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소홀히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삶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와 이론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능력은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그것은 교리에 불과할 뿐, 삶에서는 실제로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삶을 전혀 살지 못한다. 삶에서는 실제로 육체를 의지하는 삶, 즉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삶을 살 뿐이다. 성도들이 이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삶을 살 때, 그 교회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이고, 십자가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고, 성령의 임재와 통치와 역사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 가운데 그 놀라운 하나님의 유업이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신약의 교회의 모습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에서 태어나 1854년 중국으로 가서 중국내지선교회를 조직하여 그 당시 아무도 꿈을 꾸지 못하던 중국 내륙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 선교회가 설립된 지 30년이 지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였고,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 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특히 허드슨 테일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더 나아가 그는 갈라디아서 2:20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삶의 비결을 발견하고 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 삶의 비결을 발견하고 난 후 천국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우 하늘과 땅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이들도 자기가 발견한 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 가운데 바로 고린도전서 1:30을 언급한다. “주님은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봉사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되십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30의 의미를 깨닫고 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8-08-08

과학과 신앙의 관계 계몽주의 이래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해 온 인류의 역사는 믿음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나갔다. 흔히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고 표현되듯이,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왔다. 여기서 ‘의심’한다는 것은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이 아니라 뉴튼이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의심했듯이, 당연시되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합리성에 기반하기보다는 비합리적인 것조차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종교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과 신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으며 이 둘은 일종의 제로 섬(zero-sum) 관계로 생각해 왔다. 신앙인들은 과학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사고를 하거나 과학적인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종교 신앙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 말씀은 많은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현상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 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이 둘이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병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한국 개신교인들이 과학과 신앙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과학에서 말하는 진화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고자 의식 조사를 실시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작년에 한 장관 후보자가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개신교인들 사이에 창조와 진화에 대한 오랜 논쟁이 다시 관심을 끌게 된 상황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조사 결과를 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록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과학적으로도 틀림없는 사실이다’와 ‘신학적 교훈이 핵심이므로 과학적으로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가 각각 42.0%, 41.2%로 높게 나타났으며,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기록된 설화/신화이다’는 12.0%로 적게 나왔다.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은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옳다고 보는 반면에, 성경 말씀 중에 과학에서 말하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고 신학적인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따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조사 결과, 현실에서도 이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성경을 단순히 설화나 신화로 보는 입장은 소수를 차지하였다. 천지 창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든 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보는 일반적인 창조론의 입장과 하나님이 처음에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후에 진화의 방법을 사용해서 오늘날의 생물 종류가 되게 하셨다는 유신 진화론 또는 진화적 창조론의 입장이 있다. 그리고 무신론적 입장에서는 하나님 없이 우연히 생명체가 만들어져서 현재의 생물 종류로 진화되었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이 64.5%로 가장 높았으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현재의 생물 종류로 진화되었다’는 진화적 창조론이 16.9%, ‘하나님 없이 현재의 생물 종류로 진화되었다’는 무신 진화론이 11.5%로 나타났다. 최근에 진화적 창조론에 대한 입장이 알려지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기존의 창조론이 과학적인 근거와 맞지 않는다는 데서 추론된 진화적 창조론이 일종의 합리적인 대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번 조사에서 진화적 창조론이 무신 진화론보다 높게 나온 것은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실 진화론은 과학적인 발견에 따라 만들어진 이론이고 진화론 자체가 무신론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통 조상에서 진화해서 오늘날의 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화론의 요지이고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론에서도 설명하지 못한다. 곧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생명의 다양성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화론 자체는 무신론을 지지하지도 않고 유신론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진화론을 근거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무신 진화론자들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창조론자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해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조냐 진화냐’는 꽤 오래된 논쟁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진화론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진화론의 입장에 선다고 해서 창조론을 반드시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진화론 자체가 무신론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히려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로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 과학적 설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그 자체로 중립적인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인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부재로 설명할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인 신앙 우리는 성경 내용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이치에 맞고 납득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에서는 많은 개신교인들이 성경의 내용에 대해 의심이 들거나 과학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탐구하기 보다는 쉽게 포기하거나 한 쪽의 편을 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쉽게 결론에 이르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회피하거나 빨리 결론을 내림으로써 마음속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싶은 심리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결론으로 인도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탐구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현상을 객관성 있게 설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되거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에만 의지하지 않고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조차도 신앙에 대해서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또 그러한 사람이 이른바 ‘신앙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신앙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덮어놓고’ 믿기보다는 이성으로 따지며 ‘깊이 상고’하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코 신앙에 반(反)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신앙관에 대해서 존중해주는 태도이다. 현재 한국 개신교인들이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깊이 사고하지 않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고 이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진화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화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진화론은 무조건 틀렸다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앙이 없다고 단죄한다. 우리는 다양한 생각과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 공동체는 획일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합의를 추구해 가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상규 교수 기자2018-08-13

광복은 우리민족과 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독립만이 아니라 일제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로부터의 자유, 곧 신교(信敎)의 자유를 의미했다. 해방과 함께 우리민족에 주어진 일차적 과제는 식민지적 삶과 역사를 청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교회적으로 말하면 친일적 기회주의, 반신앙적 교권주의를 청산하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었다. 35년간 일제강점 하에 있었던 우리민족은 친일세력청산을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등 배교적 행위와 일제의 기독교 통치 혹은 말살정책에 협력했던 친일적 종교지도자들을 자숙케 함으로써 신앙정기를 바로잡고 교회쇄신을 이룩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굴욕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역사의 당위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교회, 그 어느 쪽도 친일세력을 제거하거나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식민지적 상황은 그 이후의 한국사회와 교회현실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왔다. 그 부정적인 영향을 민족적 차원에서 말하면 친일적 기회주의적 행태, 반민주적 권력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교회적으로 말하면 기회주의적 권력지향과 반 신앙적 교권주의 그리고 자기 보위를 위한 교회분열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가 친일적, 반신앙적 교권주의자들을 잠재우지 못한 또 한 가지 결과가 권력지향적 행태였다. 친일 전력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195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 좌정하고 득세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총회장 혹은 신학교육의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기회주의적 보신(保身)의 길을 갔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 하에서는 정권을 무조건 지지할 뿐만 아니라 불의한 권력연장 시도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고 호신과 변신의 길을 걸어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부수립 후 1950년대 말까지 한국교회는 정치 현실을 객관화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응하는데 있어서는 미숙했다. 결국 해방 후 우리나라의 정치지배층이 다수의 기능적 친일 지식인으로 충원된 결과 민족적 가치보다 현실안주적인 기존제도유지에 관심을 쏟았고, 이러한 정치지배층이 한국정치의 민주적 발전에 부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논리지만 한국교회가 친일전력 인사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교회분열, 신앙정기의 상실, 권력지향적 신앙양태 등 한국교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광복 73주년을 맞으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나 있는 와해된 윤리의식, 정신적인 가치들을 말끔히 정세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정기 목사(신나는교회) 기자2018-07-25

여론조작은 개인이나 집단이 개인의 사적인 목적이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여론을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우리나라 IT산업은 이미 세계 일류수준에 도달해 있다. IT산업은 한국 미래의 동력산업이다. 그런데 IT 산업의 찬란한 모습뒤에 가장 나쁜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댓글을 통안 여론조작이었다. 미디어들이 쏟아 낸 ‘일방통행식’기사에 억눌려 살던 시민들은 댓글을 통해 '쌍방향식'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다양한 여론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사이버가 더 이상 사이버가 아닌 21세기 현대 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 댓글 문화는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싸구려 저질 댓글들이 넘쳐난다. 과연 이렇게 악취나는 쓰레기통을 민주주의 활성화라는 장점 하나 때문에 존속시켜야 하나 라는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하루에 네이버를 보는 국민은 대략 30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네이버가 어떤 기사를 상단에 배치하고 어떤 기사는 내리느냐에 따라 여론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을 댓글 갯수와 좋아요, 싫어요 같은 반응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2200명 역할을 했다면 어찌 되겠는가? 또 좋아요, 싫어요를 매크로와 같은 자동장치를 설치해 수만번, 수십만 번을 클릭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기사는 네이버 초기 화면에 오랫동안 머물게 되고, 반대 의견을 가진 기사는 추방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여론은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힘이다. 드루킹은 민주주의를 훼손시켰다. 2200여명의 아이디를 가지고 여론을 조작했다. 특검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제2, 제3의 드루킹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현 정권이 드루킹 게이트에 대한 의혹을 낱낱이 털어버리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야당은 특히 보수정당은 정치보복으로 읽히는 적폐청산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정권을 재탈환 했을 때 드루킹 게이트는 적폐청산 부메랑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터넷 상의 여론조작이 불가능하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구글’처럼 댓글을 아예 허용하지 않거나, 인터넷실명제 도입을 해야 한다.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역사상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파하시고 여러가지 이적을 행하자 일반 대중들은 예수님을 환영한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 특히 기득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심한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에게 가서 사형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심문해 봐도 죄를 찾을 수 없었다. 석방하려고 하자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한다. 무리들의 외침에 결국 빌라도는 타협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다. 여론 조작의 무서움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무리를 충동하는 자들 막15:11절에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무리를 충동한다. 여론을 조작한다. 무리들을 움직이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계속 원망 불평했는가? 충동하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함께 섞여나온 무리들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동안 광야를 더 돌면서 광야에서 죽은 것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10명의 부정적인 보고가 백성들을 충동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는다.<민14:37> 선동을 따르는 무리들 막15:13-14절에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리들은 충동하고 선동하는 자들에 의해 끌려 다닌다. 얼마나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른 채 행동한다. 불과 4,5일 전에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는 폭도들로 변한 것이다. 무리들은 선동하는 대로 끌려다닌다. 강단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보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속삭이는 소리가 더 솔깃하고 매력적이고 재미있을 수 있다. 그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의 골방으로 향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 목소리를 따라 행동하자. 무리에게 만족을 주는 빌라도 막15:6-10절을 보면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는 노력했다. 당시에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제도가 있었다. 빌라도는 그것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한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난리를 친다. 소란이 점점 커져서 민란 직전의 상황까지 가자 빌라도는 슬그머니 타협해 버린다. 15절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결국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최악의 선택을 한다. 계속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빌라도는 무리와 손을 잡는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맹점은 다수결에 있다. 다수가 바른 생각과 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면 세상은 한없이 어지러워지고 혼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지도자는 무리의 요구를 따르기보다는, 바르고 참되고 진실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여론조사를 통해 무리가 좋아할 일만 하는 것은 진정한 리더가 아니다. 무리가 좋아할 일만 하면 결국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던 빌라도의 형국이 될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무리를 만족시키기보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도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말했다.‘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처럼 무리를 충동하면 안된다. 여론을 조작하면 안된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행동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복된 리더가 되자. 그래서 끝까지 진리편에 서고, 진리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의 기쁨되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받으며 살자.

정재영 교수 기자2018-07-02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 최근에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고 있다. 면접장에서는 4차 산업혁명 관련 질문이 빠지지 않는 단골 질문이 되었고, 회사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ICT(정보통신기술)를 모르면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될 정도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 19세기 말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 그리고 20세기 말에 인터넷이 이끈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통해 실재와 가상이 통합돼 사물을 자동적, 지능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가상 물리 시스템의 구축이 기대되는 산업상의 변화를 일컫는다. 이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말은 클라우스 슈밥이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정보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인공지능,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등의 기술을 융합하여 초연결성, 초지능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업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언급하면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모든 사물에 인터넷이 연결되어서 초연결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막대한 정보의 양을 스스로 분석하고 처리하는 인공지능을 가진 사물이 등장하는 초지능이 가능하다. 이러한 4차 산업 혁명의 특징은 기존의 서로 다른 영역의 학문과 기술과 산업이 만나 서로 융합하여 기존의 산업 사회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산업과 산업 간의 융합과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접목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벽이 사라짐으로 기존의 단단한 사회 구조의 틀을 깨고 기존에 구현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 건설, 의료, 노인, 복지, 스포츠 등 여러 다양한 산업과 서비스업에 사물인터넷이 도입되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앞으로의 사회에서 인간은 보다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4차 산업 혁명의 여파는 이미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다. 이미 70년대 이후 시작된 사무자동화와 함께 최근에는 가정생활 자동화(home automation)까지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고 자동주행 자동차는 미래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될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 무선 인터넷, SNS로 대표되는 모바일 시대를 지나 사람과 사물과 정보가 모두 지능형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초연결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나 적용되던 자동화 시설이 가정 안에서도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4차 산업 혁명이 생명과학 기술에 적용되어 노화 억제가 이루어지면 인간의 수명은 150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늙고 병든 노년이 아니라 건강하고 젊은 기대수명 150세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의 어두운 면 그러나 4차 산업 혁명이 장밋빛 미래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두운 그림자도 만만치 않다.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고용과 일자리가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인간이 하던 많은 일들이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어 단순 반복적인 일은 물론이고 매우 창의적인 영역에까지 사람 대신 기계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앞으로 20년 이내에 거의 절반 정도가 대체 위협을 받고 있으며 화이트 칼라 계열의 일자리는 80% 정도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10년 안에 약 1800만 명이 일자리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인간으로부터 노동의 즐거움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노동의 의미도 변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 더욱 심각한 불균형과 양극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제조업과 컴퓨터 산업에서도 존재했던 양극화가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더욱 극단적으로 심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경제 규모와 자본의 차이로 인해서 이 격차는 훨씬 더 극복하기 힘든 차이가 될 것이고 이러한 기술과 정보를 보유하지 못한 사회나 개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불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줄어든 노동 시간으로 인해 충분한 소득을 못하게 되면 노동 시간 단축은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또 다른 일을 찾아다니게 됨으로써 불안정한 2중직 또는 3중직의 직업 활동을 하게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이른바 ‘포트폴리오 노동자’가 되어 회사와의 지속적인 고용관계가 아닌 일련의 거래 관계의 주체인 프리 에이전트가 되어 단체 협약이나 복지 등 노동권과 관련된 제약이 따른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4차 산업 혁명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4차 산업 혁명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나 어려움을 소수의 전문가나 거대 정보를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해 분석하는 기계의 판단에 맡기게 되면 과학기술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들, 윤리적 영역들에 관한 반성적 사유의 기회를 좀처럼 갖기 힘들고 그래서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상실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공동의 선을 모색하고 발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고, 건전한 사고와 비판 능력에 기초하는 민주주의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교회 공동체의 역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종교성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개인의 필요에 대한 맞춤형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대량생산 체제가 실효성을 갖지 못하고 현재 증가하고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가 더욱 심화된다. 이렇게 보다 다양화되고 있는 개인들의 취향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처럼 종교와 신앙에 대한 욕구도 다양해질 것이다. 신앙인들도 전통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르기보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신앙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결과가 바로 가나안 성도의 출현이다. 따라서 교회는 보다 다양한 종교적 관심과 필요에 민감해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사회가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진다고 해도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사회가 단절되고 파편화될수록 공동체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는 컴퓨터나 기계가 제공할 수 없는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미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 영역에서도 공동체 자본주의가 대안으로 주목받게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개개인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협력 방식을 통한 경제 활동이 활성화될 것이다. 이것이 최근에 공유 경제가 주목 받고 있는 이유이다. 공유 경제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 자본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되는데 교회는 대표적으로 사회 자본이 축적되는 공간이므로 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재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 커뮤니티 비즈니스, 협동조합 등 공동체 자본주의 활동은 자칫 파편화된 삶을 야기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보기술과 네트워크 환경은 신앙생활이나 활동을 풍성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신앙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정신을 얼마나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새로운 환경에 담아서 표현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종교나 종교인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흔들림 없이 신앙의 정수를 지켜내면서도 그것을 날마다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하며 다음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도 현대인들이 삶의 방향을 잃지 않고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교회가 신앙공동체이자 준거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기자2018-06-19

초여름,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더위와 더불어 미세먼지가 합세하여 온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 간간히 내리는 고마운 비가 잠시 사람들의 더위도 식혀주고 대기도 청소해주어서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다. 대한민국에게 있어서 2018년 6월은 무더운 날씨보다도 더 뜨거운 이슈가 가득한 정말 의미가 있 는 한 달이었다. 6월 12일에는 남북 관계를 새롭게 하고,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협의가 있었던 북미정상회담이 있었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했으며, 앞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남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들과 정치, 경제, 문화적 협력관계를 맺어갈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과 평화 통일의 비전이 좀 더 명확해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 다음날인 6월 13일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일꾼들을 뽑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일꾼을 선출했다. 이제 그것이 누가 되었든 간에 이들의 리더십 아래 4년 동안 대한민국 각 지방의 행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모든 국민이 새로워질 대한민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다가올 내일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6월은 그저 다가올 밝고 아름다운 청사진만을 그리기에는 너무 아픈 기억이 있는 기간이다. 6.25,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된 민족상잔의 기억은 65년의 시간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다 아물지 않고 돌이켜볼 때마다 아프고 쓰린 상처로 남아있다.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미래를 생각하기에 앞서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그토록 바라던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독립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독립의 절차도 정부의 구성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만큼 국제적인 힘이 부족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서방 국가들의 이권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두 개의 정부가 설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예고 없이 이루어진 침공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했고, 준비가 되어있지 있던 남한의 군대는 연패를 거듭하며 밀려났다.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대구, 부산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 그 뒤 UN의 개입하여 전세가 뒤바뀌었지만 다시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 되었다. 3년간의 6.25전쟁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다. 군인의 경우 유엔군과 한국군이 약 18만 명이 사망했고, 공산군 측에서도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사망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중에서도 남한에서 약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너무나 가슴 아픈 민족의 그림자이다. 문제와 위기 때에는 시대적인 영웅이 등장한다. 6.25전쟁에서의 맥아더 장군과 같은 영웅은 절망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영웅의 이름 뒤에 숨어있는 수많은 무명의 희생자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던진 18만의 군 장병들이 있었기에 남한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초대 교회 역사 속에는 로마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엔 스데반이나 사도들, 교부시대의 폴리캅이나 저스틴과 같은 유명한 순교자들도 있지만 이름도 없이 형장에서 사라져간 믿음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영웅과 같은 한두 사람의 신앙의 힘도 대단하지만 정말 초대 교회를 지켜낸 것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순교자들의 희생일 것이다. 여름날 소나기는 더위를 물러나게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 비가 있기에 곡물이 자라나고 사람들이 한철을 잘 버틸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이 나라가 있을 수 있도록 지켜준 무명의 영웅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이 나라의 뿌리를 지키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6월이 되길 바란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기자2018-06-19

몇해전 교계단체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들이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응답자의 90%가 한국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를 지도자들의 명예와 욕심, 공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라 지적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기자들은 한국교회의 연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라 지적했고, 한국교회 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을 교권과 명예에 대한 ‘지도자들의 욕심’이라 답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가 심각함을 엿보게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이유가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노화되고 고령화되어 6.13지방선거에서 보듯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정당과 같은 이미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젊은 다음세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올드보이》(Old Boy)는 박찬욱 감독이 2003년에 찍은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처럼 기존세대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소통이 되지않고 단절되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올드보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의 문제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후유증도 따지고 보면 일선 교회나 목회자, 교인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연합기관의 사분오열 사태도 ‘지도자들의 문제’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교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적 수완이나 전직 경력이 화려한 정치꾼들과 노인들이 제일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교단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한 7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회의하고 밥먹고 모여서 한 일이 생산적이고 영향력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나 감투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패거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문제를 만들었고, 지도자들이 문제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교계 기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지도자는 연예인이 아니고, 지도력은 장식물이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 자체가 목적이지만, 지도자는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도력을 사용한다. 이런 지도력은 평상시에 단련돼 실전(實戰)에서 빛나고 결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 지도력이 장식물이 되면, 평상시 의전(儀典)에는 강해도 실전에서는 오합지졸 약한 군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전에 강한 군대의 의전은 소박하다.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지도자로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는 지도력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마음은 ‘연합기관’을 떠나 있는 듯하다. 분열과 갈등, 허송세월 10년이다. 이쯤되면 부부싸움에 집나간 자식 돌아오게 하듯 지도자들이 ‘연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연합하지 못하면 연합기관 간판내리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한목협의 성명처럼 ‘더 이상은 안된다’는 절박한 외침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겸허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살길이 있다. ‘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논의가 몇 년째 매주 기사화 된다. 교계 연합기관들을 언론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보도해 준다. 지리멸렬한 연합기관이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분열의 연장이었다. 이런 관심밖의 잊혀진 연합기관의 행사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다.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교회와 시대를 향한 고민과 걱정이 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자신들끼리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 '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이런 여러 연합기관들을 보면 20명 가까운 공동회장들이 60대 중반에서 70대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물러났거나 아니면 은퇴한 분들이 모여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올드하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인적 구성의 기구는 '연합운동은 늙은 정치꾼 올드보이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인상을 또 한 번 주게 된다. 이런 기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미 굳어버린 이런 경로당 이미지와 사고로 인해 그 폭(幅)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 차라리 저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기구를 운영하게 한다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어떤 기관의 대표회장은 소위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총회장과 대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총회장’이 직업이 되었다. 그 단체 구성원들도 그와 함께 덩달아 늙었고 수는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세상 흐름과 감각을 따라잡는 게 어려워진다. 아무리 명분이 뛰어나고 인품, 신망이 뛰어나도 조직이 망하면 그는 최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조금 젊다고 하는 60대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 사라진 골목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막상 본인들이 60대에 들어서면 매스컴에 소개되는 조직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주력한다. 정책이나 경륜과 상관없이 인물위주의 이벤트라는 이미 선배 ‘올드보이’들이 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또 다시 ‘올드보이’의 시대를 만든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장기적 정책 대안은 없이 1년직 자리나 인물중심의 ‘올드보이들’의 전성시대인가? 그래서인지 혼돈의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변화할 것인가? 변신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걱정을 한다면 정책 아젠다를 개발하고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 50대 대표, 40대 총무와 사무총장이라는 인적쇄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교단이든 기관이든 같은 자리를 세 번이상 역임했으면 그는 이미 원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은 또 다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아마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며 열을 많이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고(思考)의 올드보이’이다.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유연성도, 사회변화를 읽고 받아 드리는 수용성도 떨어지니 그것이 그 수준이자 한국교회의 한계이다.

여주봉 목사 기자2018-06-05

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살펴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지금 한국교회에 제시하고 계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 교회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이다. 신약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 그것이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그런데 여기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어떤 외부적인 행동이기에 앞서 그 행동을 하는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점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잘 볼 수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핵심적인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강력하게 꾸짖으면서 한 말이다(11절).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았다.”(14절), “외식했다.”(13절)고 말한다. 특히 사도 바울은 사도 베드로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16절).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였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잘 볼 수 있다(행 15:7-11). 그럼 무엇이 문제였는가? 사도 베드로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기독교인들이 오니까 그들이 두려워서 자리를 옮겨 유대인들끼리 따로 앉은 행동을 두고,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사도 베드로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럼 베드로는 항상 이방 기독교인들과 식사해야 했는가? 유대 기독교인들과만 따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면 안 되었는가? 아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베드로가 방금 취한 그 행동의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었다. 베드로가 취한 그 행동의 배후에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이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또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지 않는 것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만든다는 가치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반영하는 가치관이었다. 그 결과 사도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었고, 또한 그것을 가르쳤지만, 베드로의 그 행동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반영하는,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타락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도 베드로를 그렇게 강력하게 책망하되, 다른 말이 아닌 바로 16절의 말로 그를 책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고 그 반대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도 어떠한 외부적인 행동이기에 앞서, 그 행동을 하는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다. 갈라디아교회의 경우에도 문제는 할례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할례를 받은 그 배후에 있는 가치관에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할례의 위험성을 그렇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난 다음, 곧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갈 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정말 심각하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말로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정말 심각하게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그리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복음의 능력이 그토록 철저하게 소멸되어 있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8-06-04

우리 사회에서 성 평등 문제 최근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관련 논의가 뜨겁게 번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성 평등 관련 이슈들이 제기되어 왔는데, 최근에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이른바 서초동 노래방 살인 사건이다. 2016년 5월 17일 새벽에 한 남성이 서울 서초동의 노래방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6명은 그냥 보낸 이후에 들어온 여성을 살해하여 이른바 ‘여성 혐오’가 크게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고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 평등은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문화계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영화계, 정치계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성범죄 사건이 불거지며 큰 홍역을 앓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에서 성 문제는 여전히 수면 아래 머물고 있다. 본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종교는 권위적이고 특히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어렵다. 게다가 성 문제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 교회를 더 어렵게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쉬쉬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2중, 3중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알리기조차 어려웠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강자 중심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성 평등이 우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와 권리를 가져야 하나 실제로는 많은 교회들에서 남성 교인들이 지도력을 행사하고 여성 교인들은 부차적인 위치에 처해 온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인의 성 평등 의식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에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는 성 평등에 대한 개신교인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개신교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정, 직장, 학교, 교회 중 가장 여성 불평등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은 직장으로 나타났으며 그 다음으로 가정, 학교, 교회 순으로 나타났다. 다른 영역들과 비교해서 교회에 대해서는 남녀 평등하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출석 교회에 대해서도 비슷하지만 약간 더 높은 비율로 평등하다고 응답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 전래 초기부터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한국 교회가 다른 사회 영역에 비해 성 차별이 심하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우리 사회에서도 교회 안에서는 여성들도 상대적으로 많은 활동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집에서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로 불리는 것도 여성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 안의 주요 직책이나 역할에서는 남성 교인보다 부차적인 위치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한국 교회의 신앙 활동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들의 차별이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교회 안에서 지위의 차이가 나는 경우 상위직을 차지하는 남성이 여성의 남편, 아버지, 형제라는 가족상의 지위와 연결돼서 지위에 따른 성차별 문제는 친족 관계로 환원되어 문제시되지 않는다. 보기를 들면, 여성 장로가 인정되지 않는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장로 부인’으로 불리는 것이 일종의 대리 만족을 주기 때문에 성 차별을 민감하게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 역할 실태에 대해서는 대체로 남녀 구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전통적으로 기능적 적합성이 다르다고 여기는 주차 봉사와 주방 봉사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예배에서의 역할은 사회나 기도 등에서 부분적으로 남성 교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여성 교인이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 역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모든 영역에서 보다 남녀 구별 없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 교회 내 성 역할의 비 구분, 교회의 양성 평등에 대한 관심 증대에 대해서 매우 높은 동의율을 나타냈다. 목회자의 성별 역할에 대해서도 모든 항목에서 남녀 구분 없이 목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만 담임 목사에 대해서는 다른 항목에 비해 남성 목회자가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이 다소 높게 나와서 여성 담임 목사를 꺼리는 견해를 일부 나타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성 목회자들은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실정이고 담임 목회를 하는 경우는 거의 모두 본인이 개척한 경우이다. 곧 담임 목회자로 여성 목사를 청빙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할 정도이다. 성도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남녀 평등의 여건을 만들 필요가 있다. 목회자 설교 시 남녀 차별적 표현을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0% 미만으로 낮게 나왔다. 그러나 성 차별적인 보기를 제시하고 질문한 결과에서는 들어보았다는 긍정률이 30~40%대로 상대적으로 높게 나와서 실제로는 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내용이 성 차별적 발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앙 단계가 높은 그리스도 중심층에서는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 들어보았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음에도 남녀 차별적 표현을 들었다는 응답은 가장 낮게 나와서 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성을 목사나 장로 안수에 대해서, 응답자의 2/3 이상이 찬성하였으며, 반대하는 비율은 10%를 넘지 않았다. 현재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단에서는 이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여성 장로의 비율은 10%에 이르지 못했는데, 적당한 여성 장로 비율은 평균 31.1%로 나와서 현재보다 3배 이상 많아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따라서 보다 많은 교회에서 여성 장로를 세워서 교회 운영과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한 가지 특징은 신앙 단계가 높은 사람들,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신앙 단계가 높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전통적인 성 관념을 고수하고 있고, 성 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러 교계 조사에서 신앙심이 강할수록 더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일수록 성 불평등적인 사고를 나타냈으며 일부 항목에서는 보수성과 무관하게 신앙 단계가 높은 교인들이 더 성 불평등적인 사고를 나타내기도 하여 이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성 평등한 교회를 위하여 성별 차이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여전히 여성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들도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보다 성 평등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환경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청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공동체라고 한다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의 권리를 억압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전에 우리 사회에서 5만 원 권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신사임당을 정했을 때 여성계를 중심으로 강하게 반발한 적이 있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우리 역사에서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신사임당이 바람직하냐에 대한 문제 제기였던 것이다. 성 역할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데 이번 조사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전통적인 성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인식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가정과 사회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갖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성 평등적인 사고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성 차별적인 언행이나 제도가 개선되고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구현되는 거룩한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명전 기자2018-06-01

미국 워싱턴의 대한제국공사관이 5월15일 복원을 완료하고 22일 개관했다. 개관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자주외교와 한미우호의 상징이며 기억해야 할 역사”라 했다.113년 만에 다시 태극기를 올렸다.일본이 나라를 강점한 후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단돈 5달러에 강탈한 주미 공사관이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건물 가액만 약 15억 원 수준이다. 문화 역사적 가치를 더하면 그 100배 도 넘는다. 일본의 침탈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이 널려 있다. 같은 날 일본정부는 ‘2018년 일본 외교청서’를 냈다. 한국의 외교백서에 해당하는 국가 문서로 국내외에 외교 현안과 성과 및 전략을 망라한 것이다. 한국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동해는 일본해”라는 주장이다.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한일관계에 대해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이다. 한국은 현안이 있을 때 협력하는 가벼운 이웃 국가라는 의미다. 일본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05년 공개된 미국 CIA의 한국전쟁관련 보고서다. 한국전 당시 일본주재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J. 시볼드의 기록이다. 시볼트는 “일본의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횡재(橫財:windfall)를 했다”고 썼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군과 유엔군은 전쟁물자와 각종 서비스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미군은 전투 중에 파괴된 차량과 무기 등 군수물자의 80% 이상을 일본에서 수리 제조했다. 당시 일본 내에 세워진 군수물자 생산 공장만 860개 소나 되었다. 한국전쟁 첫해 6개월 동안 일본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외화 수입의 15%를 차지했다. 자동차 등 전쟁물자 2억2천만 달러, 기지공사 등 용역 수익 9300만 달러를 비롯해 총 3억 1,500만 달러에 달한다(일본경제안정본부 통계). 한국전쟁이 일본에 안겨준 외화수익 비중은 1951년 GDP의 26.4%, 1952년 36.8%를 차지했을 정도다. 일본경제는 한국전쟁 3년 차인 1952년, 세계대전 패망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한국전쟁 혜택은 당시의 화폐가치로 약 10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은 자동차, 철강, 조선, 건설, 의약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견고한 성장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요타자동차는 1950년 파산 위기에서 살아난 기업이다. 1949년, 상용차 수출이 13대에 불과했다. 6·25가 발발하고 그 해에만 상용차 5502대를 수출하면서 파산을 면했다. 도요타 에이지 사장은 회고록 ‘결단’에서 한국전쟁 특수(特需)는 “구제의 신이나 다름없었다”고 썼다.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도 “일본을 위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기반으로 전후 20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 성장가도를 달렸다. 전쟁이 끝난 후 10년 간은 주로 전쟁복구 물자를 공급했고, 그후 10년은 한국 산업화를 시장으로 활용하며 성장했다. 일본은 현재도 한국이 유일하게 무역 적자를 보는 나라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역사의 고비마다 이어져 온 침탈과 지배, 약탈의 나라였다. 민족의 비극, 분단의 아픔도 그 근원은 국권의 강탈에서부터 유래한다.지금 이 순간도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한다. 섬나라, 기지국가 일본의 콤플렉스와 패전 전범국가의 트라우마를 모르는 바 아니다. 일본이 꿈꾸는 보통국가로 가는 좋은 길은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이 돕는다면… 한반도에 냉전과 휴전협정 체제를 마감하려는 대전환의 순간이 다가왔다.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은 남북한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다. 그 길은 70년의 전쟁체제를 마감하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끄는 동행 시대의 개막에 있다. 냉전구조가 해체되면 불행했던 식민지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남북 그리고 일본이 평화의 시대를 여는 주역이면 좋겠다. 사이 좋은 이웃 이길 소망한다. 그리고 나면 현해탄을 가로질러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연결되는 보통국가 일본의 길도 열릴 것이다. 한국은 일본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 역학 구도를 보면 한반도의 휴전협정 체제는 일본과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일본의 역할에 주목한다. 더불어 기지국가 일본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모색도 필요하다. 아베 총리가 전범국가 일본을 보통국가로 세우려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경계는 하되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일본이 보통국가로 서는 것과 전쟁체제를 해체하는 것은 한일이 미래로 가는 하나의 길 위에 있다는 인식이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에 협력하고 평화국가로서 자리매김 하도록 돕는 것이다. 일본도 국내정치의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한반도와 긴장을 조성하는 3류 정치를 끝내고 일류국가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중국, 러시아를 어떻게 대우할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명록에 썼던 ‘자주외교’의 길은 한반도의 평화체제에서만 명료하게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정국 선교사 기자2018-05-23

세계인구가 72억을 넘어섰다. 이를 3등분하면 재미난 그림이 나온다. 3분의 1인 24억의 인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개신교(오순절교 포함) 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독립교회 그리고 사이비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3분의 1은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 근처에 사는 불신자들인데, 이들 눈에는 여러 종류의 기독 교회당이 쉽게 눈에 보이며, 친지와 친구, 사업 동료 중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전도를 받을 수 있는 전도대상자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1은 그들 주변에 교회나 교인이 잘 보이지 않거나 있어도 소수에 불과해 전도의 기회가 거의 없는 대상이어서 누군가 그들에게 문화와 언어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필요한 집단으로, 우리는 이들을 ‘미전도종족’이라 부르는데 보다 쉽게 말하자면 선교대상자들이다. “기독선교사들이여, 어디 있는가?” 1989년 (지금부터 30년 전) 서구 선교전략가들은 그들의 선교사가 너무 많이 전도대상자 속에서 사역함을 발견하고, 기존 선교사의 재배치를 강력히 추진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약 11년 후 2000년에 한인선교사의 배치를 조사한 리서치에서 한인선교사의 배치도 서구선교사 이상으로 전도대상자에 많이 배치돼 있어, 전략적 재배치, 전진배치를 주장했다. 이동휘 목사의 지휘 하에 있던 바울선교회 등이 이에 적극 호응해 필리핀 주재 선교사를 중동, 서부아프리카에 재배치시킨 일은 한국선교계 큰 도전이 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단과 선교회는 현지 선교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재배치 성과는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통계를 보니 6년 전 아시아 모국에 나간 선교사 수가 4,920여명 정도였는데 작년 말 통계가 3,900여명으로 준 것이 눈에 띄었다. 일부 선교사들이 그 나라에서 자진 재배치한 경우도 있었지만 현지 당국의 강압으로 강제 출국 한 경우가 상당했다. 참새 한 마리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이뤄지는데, 그분의 선교동역자들의 강제 출국사건은 하나님의 또 다른 재배치 전략임을 읽을 수 있었다. “거기 서 있지 마세요”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곳을 가끔 돌아볼 때가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선교대상지역인가 아니면 전도대상지역인지를 살펴보자. 선교사는 그런 점에서 선교대상자를 향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토드 존스 박사는 21세기 들어 그가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끔찍한 통계를 우리에게 제시한 바 있다. 즉 “세계 선교사 중 순수한 미전도종족 즉 선교대상 종족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가 오직 3%에 블과하고, 나머지 97%는 전도대상에서 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나 끔찍한 통계이다. 우리는 이제 전도대상자에서 일하는 선교사를 향하여 “거기에 더 이상 서 있지 말고, 선교대상자에게로 가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는 이를 잘 생각하여 선교사의 전략적 배치를 유도해야 한다. 요즘은 세계기도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여러분의 선교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로마 가톨릭교 성도나 정교회 신자 전체를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로 치부하는 그 셈법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들 숫자의 4분의 1만이라도 복음을 들었다고 간주하면 어떨까? 그 4분의 1이 꼭 거듭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적어도 복음을 접촉하고 있는 이들이 아닐까? 4분의 3은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처럼 간주해도 좋다. 그렇게 계산해보면 우리가 보낸 선교사들이 서 있어야 할 데가 자연스럽게 도출이 된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는 미전도종족이 4,700개나 존재하며 그들 속에는 선교사가 거의 없다. 그 많은 한인선교사는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우리의 선교대상은 복음의 미개척지역이나 미전도종족 그리고 비복음화 영역으로 설정해 한인선교사들은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최후의 개척자들이 돼야 한다. 한국 선교계는 Target 2030마스터플랜(2030년까지 미래선교계획)을 세워 한인선교사의 전략적 배치를 돕고 있다. 현재 한인선교사는 이러한 전방선교대상보다 전도대상인 일반 선교대상에 너무 많이 포진돼 있다. 전방에는 선교사가 턱없이 부족한데, 전도대상자들을 위한 선교사는 너무 많고 그 길은 넓고 찾는 신임선교사도 많다. 주님께 물어보라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을 기존 선교사 그리고 선교사 파송 교회에 드리는 바이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8-05-16

요즘 갑질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다. 그리고 미투 운동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이전에는 없다가 갑자기 문제가 많이 생긴 건가? 아니다. 이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계속 갑에게 억압되어 있었다. ‘너 하나 입다물면 모두가 편안해’ 집단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음지에 있던 분들이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있다. 그러나 갑은 언제나 갑이 아니다. 갑 위에 또 갑이 있어 갑과 을의 위치는 늘 바뀐다. 대통령이 그 나라에서는 갑인 것 같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경찰이 죄인 앞에서는 갑이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그러고 보면 국민이라는 이름은 민주사회에서는 영원한 갑인 것 같은데, 가난한 사람은 돈 있는 사람 앞에서 을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갑이고 누구나 을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에서는 상점에서 고객이 소리를 높이면 그때부터 상대를 안 한다. 계속 방해하면 경찰을 부른다. 경찰이나 공무원을 상대로 업무를 방해하는 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인식한다. 일본은 가난해도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천대하지 않는다. 미국은 돈이 많아도 안 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국은 부자들에게 가장 편한 국가이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갑질하는 사회는 후진사회이다. 이러한 후진성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가치관, 사회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품격이 되는 저질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불러온 병폐이다. 성경에도 갑질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요셉을 노예로 판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도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자 성폭행 미수범으로 몰아 감옥에 갇히게 한다. 사울왕도 다윗에게 갑질을 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환호에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윗도 왕이 되어 갑질을 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인 것을 알면서도 범한다. 아이가 생기자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급기야는 우리야를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한다. 라반도 야곱에게 갑질을 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에게 7년을 섬긴다. 첫날밤을 치른 야곱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 곁에 있는 여인이 레아임을 알았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봉사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일 시키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자기 마음대로 변경했다. <창31:7> 노동력 착취였다. 인간의 숨길 수 없는 '갑질 본능'이 라반에게도 있었다. 라반이 처음부터 야곱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카를 수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라반은 먼데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라반인지도 모른다. 갑의 권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위, 아래가 있다. 위계 질서가 있다. 그 위계 질서가 무너지면 안 된다. 성경에도 분명히 사람간에 계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신 28:13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으며, 위가 있고 아래가 있다. 그러므로 갑질과 갑의 권리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제품에 하자가 있어 컴플레인을 거는 것이 갑질인가? 그것은 갑의 권리이다. 마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주인은 이윤을 남긴 두 달란트 받은 종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한다. 그런데 땅에 감추었다가 가지고 온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있는 것 까지 빼앗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한다. 이것은 갑질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이다. 식당을 하시는 분은 갑인 고객의 불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야곱이 성공한 것은 라반의 갑질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셉이 성공 것도 형들과 주인의 아내의 갑질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 부모는 자녀의 최고의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부모를 통해 배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을 분노로 들썩이게 만들고 있는 세 모녀의 갑질을 보면서 '그 어미에 그 자식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소리지르는 것, 욕하는 것 똑같았다. 갑질의 대물림이었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칭찬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배려가 몸에 밴 국민성 때문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당시에 최고 갑질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한다. 토색한 것 4배로 갚아주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갑질하던 사람이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 후 삭개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 있는 사람이 더 겸손한 인격을 가져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공식이 깨져야 갑질도 멈출 것 같다. 갑질이 아닌 배려가 가득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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