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라 기자2018-11-18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1980년 암울한 시대에 좌절하고 고뇌하던 수많은 청춘을 위로한 노래 '청춘'의 가사 일부다. 40여 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2018년의 청춘은 여전히 '청춘'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청춘의 아픔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일까? <위클리굿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주변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처한 실제적인 고민을 요청해, 청년 멘토들과 함께 이에 대해 짚어보고 해답을 모색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청년사역과 목회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를 만났다. Q. 힘들게 직장에 들어왔는데, 일에 치여 말씀과 기도생활이 어려울 때가 많다. 직장을 다니며 멀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민이다. 송태근 목사(이하 송): 말씀과 기도는 중요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면서, 일상의 일(work)은 거룩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중세 이원론적 발상에서 기인한 생각이다. 중세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했다. 그래서 성직자와 세속인을 구별했고, 교회와 일상을 구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구별을 없앴다. 칼빈은 일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직'이라는 말을 없앴다. 일에 치여 사는 것도 우리는 '성직'을 감당하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바울도 주께 하듯 감당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골 3:23). 이런 생각을 갖는다면 말씀과 기도생활이 어렵다는 것 자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대신 그 외의 시간에는 말씀과 기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래 그림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신발>이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 중 이 그림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상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 낡은 신발을 보며 삶에 대해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즉 내게 맡겨 주신 일을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일'임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빈센트 반 고흐 <신발> ⓒ위클리굿뉴스 Q.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해 조급한 생각마저 든다. 배우자 기도를 할 때, 어떤 부분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까? 송: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선택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코 조급해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불행을 재촉하는 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자녀를 양육하는 생물학적 결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듯 좋은 조건이 결합해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경제적 결합이 돼서도 안 된다. 경제적 결합을 추구해서 결혼했는데 파산하면 다음은 이혼밖에 없다. 결혼은 가치관이 합해지는 과정이다. 나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또 질병과 갈등이 있더라도 함께 극복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렘브란트의 <선술집의 방탕아>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한 생활을 할 때를 묘사한 그림이다. 흥미로운 것은 방탕한 남자의 얼굴에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을, 음탕한 여인의 얼굴에 자신의 아내 사스키아의 얼굴을 넣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렘브란트의 신앙고백과 같은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으로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됐고, 그 '조건'을 토대로 상류층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이 방탕한 아들의 행동과 다르지 않음을 이렇게 그린 것이다. 지금도 '믿음의 배우자'를 외치고 있지만, 속마음은 돈 많고, 외모가 좋고, 조건이 훌륭한 사람들을 우선순위로 삼고 있지 않은가? 바른 우선순위를 통해 배우자를 결정하시기를 소망한다. ▲렘브란트 <선술집의 방탕아> ⓒ위클리굿뉴스 Q. 요즘 교회엔 성비로 놓고 보면 형제보다 유독 자매가 많다. 그래서 일부 자매는 비기독교인과 결혼을 해야 할 것 같다. 크리스천을 만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 고민이다. 송: 우선순위를 갖고 결혼하기를 권한다. 결혼해서 자칫 삶이 불행해지거나 오히려 신앙을 떠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결혼을 전제로 누구를 만나야 할지를 '선택'으로 생각하지 말고, 결혼 자체도 하나의 '선택'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결혼은 가정을 이루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인생을 가정에 희생해야 하는 시작이다. 신앙을 희생하면서 해야 하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 두 작품 가운데 어떤 그림이 훌륭해 보이는가? 둘 다 도메니코 페티라는 화가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이다. 왼편은 1610년에 그림 '걸작'이고, 오른편은 1605년에 그린 '습작'이다. 즉 왼편을 완성하기 위해 오른편 그림을 연습 삼아 그렸던 것이다.왼편의 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있다. 그러나 워낙 우피치 미술관에는 르네상스 걸작품들이 많아서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면 오른편 습작은 독일 뒤셀도르프로 팔려나가서 현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궁전의 복도에 걸린 초라한 그림이다. 그러던 19세기에 독일로 유학을 온 영국 여성 프란시스 하버갈은 이 그림 앞에 선 순간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이 물음 앞에 인생이 무너지고 회심을 한다. 그리고 바로 영국으로 귀국해서 일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찬송가를 남긴다.성찬식 때마다 부르는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가는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찬송가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썼던 하버갈 여사를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신앙을 희생하면서 해야 하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란다. ▲도메니코 페티 <이 사람을 보라> ⓒ위클리굿뉴스 Q. 결혼 후 위기가 닥쳤고, 배우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송: 아래 그림은 '인상주의'를 열었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 카미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왼편 그림은 아내와 자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평온해 보인다. 반대로 오른편 그림은 1879년에 그 아내가 임종하던 순간에 그녀를 그리고 있다. 사랑하던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림을 그린 모네의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될까? 모네는 지독히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런 어려움을 이기며 화가의 명성을 쌓던 중 찾아온 아내의 죽음은 모네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몇 마디 글을 써서 '용서해라' 혹은 '이혼해라'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볍고 무책임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렇다. 처음 배우자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인가? 처음 교제를 했을 때는 배우자를 하나의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부가 불화를 겪는 이유는 결혼 전에는 서로가 '존재'로서 가치를 지녔지만, 결혼 후에는 가정을 영위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배우자가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겉돌지는 않는지, 경제적인 '도구'가 되지는 않았는지, 부부가 함께 점검해야 하는 부분이다. 혹 자녀가 있다면 반드시 자녀들이 상처받지 않는 기준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 ⓒ위클리굿뉴스 (위클리굿뉴스 11월 11일, 47호 기사)

조준만 기자2018-11-07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개혁주의자들의 구호다. 이 말은 교회가 특별하게 ‘개혁된’ 때가 있었음을 전제한다. 종교개혁 기념일은 교회가 말씀과 믿음으로 '개혁된' 때를 기억하는 날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 지 1년이 지났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개혁, 자기 깨어짐의 변혁이 진행되고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이에 본지는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로 1)세습, 2)혐오와 배제, 3)신학교육의 위기 등을 총 세 차례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혐오와 배제'를 다룬다. 혐오하고 혐오받는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한국교회는 가짜뉴스로 홍역을 앓고 있다. 가짜뉴스에 등장하는 이슈는 주로 '무슬림(난민-외국인)과 동성애'다. 가짜뉴스의 패턴은 난민과 동성애로 인한 위협을 부풀리거나 이들을 반대했다가 박해를 당했다는 식이다. 이처럼 한국교회 내에서 무슬림, 동성애자들에 관한 내용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사회관계망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왜 특정 대상을 향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만들어내고 가공해서 유통했을까.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서? 최근 NCCK 언론위원회에서 주최한 '가짜뉴스와 개신교' 세미나에 참석한 매원 감리교회 이주현 목사는 "10년 전부터 교회가 침체했다. 성장이 멈췄고 교인 수가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구성원들의 결집을 위해 선정적인 이슈가 필요했고 종북, 동성애, 이슬람을 통해 결집을 꾀하려는 프레임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신뢰를 잃은 한국교회가 건강한 자정을 선택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적'을 찾아 내부결속을 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내부결속과 위기 해소를 위해 적을 만들어낸 사례는 많다. 중세교회는 수많은 여성을 마녀로 몰거나 유대인과 무슬림을 '악마화'했다. 일례로 당시 흑사병이 창궐했던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우물과 샘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위와 상관없이 분풀이와 희생양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폭도로 변해 유대인 거주지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혐오의 대상이 된 유대인들이 가짜뉴스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혐오와 미움의 대상이 과거 '공산주의'였고 오늘날 '무슬림과 동성애자'로 바뀌었다.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어떤가. 한국교회는 '혐오하고, 혐오 받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인식은 '선망하는 종교'에서 '믿을 수없는 종교'로 바뀌었다.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개신교가 신자 수에서는 1위지만 사회적 신뢰도 부분에서는 꼴찌였다. 한국교회의 어두운 현실은 동성애나 난민, 이슬람에 대해서는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 열심을 내며 반대를 외치면서 교회 안에 만연한 탐욕과 위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데 있다. 한국교회는 건강한 토론과 사유하는 힘에서 나오는 설득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마틴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맞섰을 때도 그가 택한 방법은 잘못된 신학과 교리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내거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객관적인 진리로 건강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가했다. 상대방을 악마로 매도하거나, 덮어놓고 비판하지 않았다. 성경에 근거하여 말하고 설득했다. 폭력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한국교회는 루터가 취했던 태도에서 배우고 행해야 한다. 이 땅에 오셔서 이웃사랑과 환대를 가르치신 예수. 그의 이름으로 혐오와 배제의 말을 앞세우고 있는 한국교회. 예수가다시 오셔서 교회를 보면 뭐라 하실까. 특정 대상을 악마화하고 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웃사랑과 환대를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그리고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이다. (위클리굿뉴스 11월 4일, 46호 기사)

천보라 기자2018-11-14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1980년 암울한 시대에 좌절하고 고뇌하던 수많은 청춘을 위로한 노래 '청춘'의 가사 일부다. 40여 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2018년의 청춘은 여전히 '청춘'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청춘의 아픔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일까? <위클리굿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주변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처한 실제적인 고민을 요청해, 청년 멘토들과 함께 이에 대해 짚어보고 해답을 모색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청년사역과 목회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를 만났다. Q. 살다보면 소위 잘 나간다는 비기독교인의 삶을 보며 비교의식을 가질 때가 많다. 특히 고난 가운데 주님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크리스천 청년도 많은데. 송태근 목사(이하 송): 현실의 문제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재확립해서 이겨내는 것이 믿음의 선진들이 취했던 태도이다. 바울은 현실적 불행에 대해서 현실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분명히 한다(빌 3:8). 베드로도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분명한 '소망'을 성도들에게 설명한다(벧1:1).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에 대해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거나 현실적인 행복의 조건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 신앙을 그렇게 설정하고 유혹한다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은 바른 '소망'을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분명한 소망을 붙잡을 때 현실을 이길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헨리 8세(왼편)와 <대사들>(오른편)이라는 작품이다. 헨리 8세는 1534년 수장령을 선포했다.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한 것이다. 교황에게 대적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헨리 8세로 인해 영국과 로마 교황청의 관계가 나빠졌고, 프랑스에서는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두 명의 대사들을 보냈다. 두 명의 대사를 표현한 그림이 오른편의 <대사들>이다. 그림 속 두 사람 사이에 많은 물건이 나온다. 이 그림을 그린 한스 홀바인은 정치적 분열과 혼란한 시대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중재를 도모하는 의미를 표현하는 많은 물건을 대사들 사이에 배치했다. 두 사람 가운데 길게 늘어진 그림은 해골이며,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왼편 상단에는 녹색 커튼 뒤로 마치 숨은 그림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려 넣었다. 즉 홀바인은 세상은 잘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역사는 커튼 뒤에서 예수님이 지켜보며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현실을 살면서 잘나가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불행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스 홀바인의 조언처럼, 역사를 움직이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현실의 절망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위클리굿뉴스 Q. 주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 믿음과 구원의 확신, 어떻게 가질 수 있나. 송: 처녀가 스스로 잉태하는 것이 가능한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이해되는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면 어떤 상태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 상상이 가는가? 크리스천은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다. 하지만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얻은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과 풍랑 속에서 살아간다. 그럴 때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성경을 통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래 그림은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가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신앙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그 역시 결혼, 성공, 행복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렘브란트는 배의 풍경을 빛과 어둠으로 나눈다. 왼편의 빛에 노출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다. 풍랑을 만나면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이런 모습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표현한다. 반대로 오른편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풍랑이 일어난 것에 대해 원망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모신 배는 항상 고요한 바다를 항해하지 않는다. 풍랑을 만나고 폭우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모신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비단길, 꽃길을 간다고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풍랑 속 예수> ⓒ위클리굿뉴스 Q. 늘 상황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 여기고 실행해왔다. 설령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 의지에 따른 결정일까봐 망설이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궁금하다. 송: 하나님의 시선이 있음을 믿고 걸어가야 한다. 어떤 길은 우리의 시선에 완벽한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망의 길이다(잠 14:27). 반면 때론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과정임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럼 어떻게 앞길을 계획하고 걸어가야 할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는 것, 비록 내일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내어드리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비전을 쫓는 삶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때로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실수마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그것을 믿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하다. 아래 그림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아담 엘스하이머라는 화가의 작품 <이집트로의 도피>다. 당나귀에 탄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난 중이다. 이들 뒤에는 온통 먹구름뿐이고, 요셉은 등불 하나만을 의지한 채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다.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시선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어떨까? 요셉이 지나온 과거(오른편)에는 밝은 달이 떠 있다. 그들이 만날 미래(왼편)에는 먹구름이 더 크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할 목자들이 있고, 하늘에는 별이 있어서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며, 그분의 방식이다. 때때로 우리는 먹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어둡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비전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아담 엘스하이머의 <이집트로의 도피> ⓒ위클리굿뉴스 Q.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갈수록 더해지는 태도에 마음이 괴롭다.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참고 이해해야 하나. 송: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갈등과 미움 없이 순적하게 지낼 수 없다. 신앙의 양심으로 살아가면서 관계에 어려움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려워해서 피한다면 바울은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말한다(고전 5:10).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는 어차피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또한 말씀을 실천해서 빛과 소금이 돼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에서 타협하고 침묵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할 영역이 있지만, 불의와 모순까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용서하고 감싸줘야 한다. 그러나 도를 넘은 것이라든지, 불의의 영역이라면 과감히 끊어야 한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이중계약, 뇌물, 성희롱, 성차별, 부당함 등까지 참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역이 모호해지면서 크리스천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지금 괴로워하는 부분이 개인적인 부분인지, 아니면 과감히 끊어야 하는 부분인지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이 가져야 하는 시선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어두운 곳까지 미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종교개혁 화가였던 피테르 브뢰헬의 <거지들>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사회를 풍자한다. 농부, 관리, 군인, 상인들이 목발을 짚고 있는데, 네덜란드 속담을 반영하고 있다. '거짓은 목발을 짚는다'라는 속담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브뢰헬은 이 그림의 핵심을 오른편 뒤에 검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종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회는 불의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종교인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혹시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속에서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피테르 브뢰헬 <거지들> ⓒ위클리굿뉴스 (위클리굿뉴스 11월 11일, 47호 기사)

이상규 기자2019-01-03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본지는 종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불을 지폈던 3·1운동의 의미를 조명하고, 이를 통해 한국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삼일운동은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지 10년 만에 일어난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으로 우리 민족 근대사의 전환점이 됐다. 1919년 3월 시작돼 적극적으로 2개월, 광의적으로 1년 여에 걸쳐 전국적으로 그리고 거족적으로 전개된 항일 투쟁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거사였다. 이 항일투쟁에서 수만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한 해 동안 사망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구속자 4만 6,948명에 달했다. 파괴된 교회당 47동, 학교 2개교, 파괴된 민가 715호로 기록돼 있다. 정한경의 ‘조선 사정’에 의하면 그 피해는 박은식의 기록보다 많다. 이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거사가 일어난 이유라면 항거해야 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전 영역에 있어 무단 독제체제였다. 총독부는 최고 통치기관으로서 총독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과 군사에 관한 전 권을 장악한황제였다. 총독은 자신의 명령을 제령(制令)이란 이름으로 발표해 법률을 대신하게 했다. 당시 각종 악법이 제정됐는데, 경찰서장의 즉결로서 조선인들에게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다는 '범죄즉결법', 조선인들에게만 적용되던 태형(笞刑)은 조선인의 인권을 유린한 무제한의 권력 행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토지조사사업이란 이름으로 땅을 빼앗았고 회사령, 어업령, 공업령으로 민족자본을 수탈하고 경제적인 통제를 가했다. 특히 신교(信敎)의 자유를 유린하고 종교행사를 통제하고 감독했다. 성경이나 찬송 일부를 설교하거나 노래하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만세운동에 앞장섰고 기독교회는 만세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피해가 컸다.삼일운동 정신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7년 3월 1일 타종기념행사가 열린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3·1 만세운동 연극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다.ⓒ위클리굿뉴스 첫째는 저항정신이었다. 일제하에서의 굴욕과 수난, 폭력적 통제와 탄압, 신교의 자유마저 유린하는 처사에 대한 저항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현실적 고통이 거국적인 저항을 불러온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보다 앞서 현실적 압제가 저항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였다. 둘째는 독립정신이다. 일제의 조선 지배는 자유를 유린하는 정의롭지 못한 통치였다. 강한 자가 약자를 압제하는 것도 부정의이지만, 강한 나라가 약소국을 압제하고 자유를 유린하거나 통치하는 것 또한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삼일운동은 부당한 침략과 포학한 식민지배에 대한 항거이자 자유와 해방의 요구였다. 독립정신이었다. 셋째, 애국정신이었다. 삼일만세운동은 애민 애족의 발로였다.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성이 독립운동 저변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애국, 애민, 애족의 정신이었다. 넷째, 삼일운동은 연합정신이었다.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 이보다 앞서 2월 1일 만주 길림에서의 '무오독립선언'이 있었고,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조직되고 이들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해 민족의 독립을 호소했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국내로 들어와 기독교계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과 접촉하고 만세운동 세력과 교류했다. 기독교측 독립운동은 이승훈 중심의 평안도지방 장로교계와 서울의 감리교계 중심의 운동이 있었으나 상호 협력했으며, 하나 된 기독교계는 천도교측과 회합하고 만세운동에 협력했다. 2월 하순에는 학생 그룹과도 연합하게 된다. 그야말로 삼일운동은 종교적 신념을 달리하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가 연합한 운동이었다. 민족의 과제 앞에 종파를 초월한 연합운동이 삼일정신이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도 불의와 부정의에 대한 항거, 자유와 정의의 추구, 북한 인민의 인권에대한 관심, 그리고 진정한 나라사랑,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연합하는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준만 기자2019-01-27

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박경진 장로(꽃재교회)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태어났다. 외눈박이, 애꾸,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란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됐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배경이 됐다. 힘든 시절을 딛고 진흥문화를 설립해 업계 1위의 캘린더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 장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공'을 사회에 나누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해외입양인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박 장로는 해외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입양인초청모국방문' 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통해 해외 입양인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건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건강한 자부심을 얻고 돌아간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2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 장로는 "해외입양인들이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 장로는 지난 2010년 '진흥장학회'를 설립해 재능과 열정을 갖췄지만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돕고 있다. 지난해까지 4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진흥장학회의 시작은 박 장로가 회갑 축하연 대신 그 비용을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내인 한춘자 권사의 칠순 때 개인 소유의 빌딩과 임대 수입금, 자서전의 판매 수익금을 출연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장학회 설립에 대해 그는 "지난날 성장 과정에서 체험한 뼈저린 가난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겠다는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됐다"며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장학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김신규 기자2018-11-05

한반도 훈풍일까? 위기일까? 위클리굿뉴스는 지난 호에서 창간 1주년 기획 특집으로 종전선언과 비핵화 논의 등 급변하고 있는 '대전환의 한반도' 현실을 짚어봤다. 또한 이러한 시점에서 통일 독일의 경험을 비춰 우리 국민들의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시각을 조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남북의 평화통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사회나 한국교회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를 살펴본다. 현 한반도 상황에 대해 일부의 우려도 없지 않다. 도희윤 행복한통일로 대표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기운은 훈풍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한반도가 전쟁의 도가니로 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전망한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할 뿐 체제 선택의 문제가 남북이 서로 양보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분단 70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과 북은 사상과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북통일이 현실이 돼도 한동안 사회적 혼란과 남북한 국민들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인 통일에 앞서 우선 남북 교류협력과 사회경제적 통합이 우선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소한 대만식이나 홍콩식의 통일방안도 남북한 통일 대안이 될 수 있다. 통일 준비 제대로 하고 있나?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종전선언과 북핵 폐기가 논의되는 현 시점에서 오히려 통일준비의 퇴보를 우려한다. 모든 정책이 평화라는 미명 하에 '분단고착화, 영구분단'으로 가고 있다는 시각이다. 그러면서 현 정부가 북한주민의 노예적 생활상황, 북한의 잔혹한 인권탄압 등을 거론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낭만적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막대한 통일비용과 남북 경제적 차이에 따른 우리의 경제적 손실도 우려한다. 그러나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 제품의 단가 경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통일 후 인구가 늘어나지만, 반면에 활용할 수 있는 큰 땅이 생기고 풍부한 자원이 생긴다는 점도 우리의 장점으로 부각된다. 탈북지식인들로 구성된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현재의 북한 주민들에게는 남한과 같은 사회 경제제도와 자본주의 시장 등에 대한 시장의 적응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독일이 통일될 당시에는 동독의 시장규모도 아주 작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제도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동독과 서독의 경제제도는 물론 시장과 의식적인 측면에서 지금의 남북한과는 완전히 달랐다"며 일부에서의 통일비용 우려는 기우라는 설명이다. 올해 남북정상회담을 '평화혁명'이라고 밝혔던 서울대 통일연구원 김병로 교수는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 통일보다 먼저라는 점을 강조했다. 4·27판문점 선언은 북한 비핵화와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이런 훈풍을 한국교회와 죽음도 불사한 북녘 신앙인들의 오랜 기도 결실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통일은 남북이 서로 다른 두 체제가 하나로 결합되는 과정인 만큼 양국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한 채 상호 협력하는 △독립국가연합(CIS) △유럽연합(EU) △아세안(ASEAN)과 같은 협의체 성격의 연합제. △구소련 △미국 △독일 등처럼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체제인 연방제.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아래 점진적 통일을 지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통일 시대 한국교회의 역할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70년 분단을 겪어온 만큼 통일을 위한 연합과 협력의식, 마인드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C국에서 탈북민 사역을 했던 김동춘 목사(SFC 대표간사)는 성경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연합과 협력의 좋은 모델을 한국교회의 통일 준비 모델로 제시했다. 그는 "70년을 넘게 전혀 다른 사고체계와 행동양식을 가졌던 남과 북이 만났을 때 갈등 발생은 당연하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이런 갈등 해소와 통일코리아를 세우기 위한 연합과 협력의 정신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즉 학사 에스라의 영적각성과 능력 있는 총독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건축은 연합과 협력의 모델인데 북한교회 세우는 것과 북한사회 치유하는 것에 대한 협력이 균형있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불어오는 훈풍으로 '통일이 온다'란 기대감이 지나치게 높은 점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성도들은 일희일비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통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개방과 부흥에 중점을 두고 북한을 섬기는데 집중해야 한다. 또한 남북한 사람들을 포함한 동북아의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통일이후의 사회를 한국교회가 준비해야 한다. (위클리굿뉴스 11월 04일, 46호 기사)

성현 목사 2018-11-02

흔히 한국사회에서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본 영화는 영화적 재미를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특별히 영화 <신과 함께>는 2017년 12월 1편 '죄와 벌'이 1,400만 명을, 2018년 8월 2편 '인과 연'이 1,200만 명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연속 1,000만 명이 넘는 관객 동원을 기록한 영화가 됐다. 개봉 전 이미 전 세계 100개국이 넘는 곳에 선판매가 되었고, 폭발적인 흥행과 이후의 기대에 따라 3, 4편이 제작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과연 크리스천들은 영화 <신과 함께>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할지를 짚어봤다. ▲성현 목사 (필름포럼 대표, 창조의정원교회 담임목사) ⓒ위클리굿뉴스 1. <신과 함께>의 흥행 요인 우선 상업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제대로 간파한 감독의 역량을 들 수 있다. 김용화 감독은 <오! 브라더스>(2003), <미녀는 괴로워>(2006), <국가대표>(2009)까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300억 원이 넘는 제작?홍보비용을 들였던 <미스터 고>(2013)가 흥행에 실패하며 큰 어려움에 빠졌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제작비 400억 원의 <신과 함께>라는 대작영화를 만들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고, 관객이 어떤 코드에서 호응하는지 면밀히 분석해 이를 영화에 반영했다. 여기에 <미스터 고>를 만들며 쌓인 CG(Computer Graphic)에 대한 노하우가 결합되어 세련되면서도 안정적인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이 4~50대와 10대였다는 통계를 보면, 가족 단위로 관람하기에 좋은 영화였다는 점 또한 흥행요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큰 인기를 모았던 원작 웹툰(주호민 作)의 '저승-이승-신화' 구조 속에 담긴 단편적인 에피소드와 다양한 캐릭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잘 엮어내 관객들이 어렵지 않게 영화의 서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음으로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용서'와 '위로', '구원'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1편은 '모성애'로, 2편은 '부성애'로 풀었다. 그 안에 형제, 유사가족의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포용력을 가졌고,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 또한 관객들이 심판자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사연을 경청하는 방식을 취하게 함으로써 영화에 온기를 더했다. 또 한 가지는 <신과 함께>의 영화적 배경이 한국인에게 익숙하면서도 한번 쯤 경험해 보고 싶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신과 함께>는 불교의 세계관을 주요 모티프로 삼되 유교, 도교와 민간신앙이 혼재된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기독교인들조차 무의식적으로 '전생', '인연', '액땜'과 같은 말을 사용하고, 이사를 하거나 먼 길을 떠날 때 날수를 따라 동·서·남·북 네 방위(方位)로 돌아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하는 '손'이 없는 날 이사를 가려는 풍습이 존재하며, 새해가 되면 평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토정비결'을 보고,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화제작을 시작할 때 고사 드리는 모습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직도 한국인 대다수의 심성에는 <신과 함께>에서 그리는 사후세계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꽤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신과 함께>의 사후세계관은 대다수의 한국 성인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접해온 <전설의 고향>이나 '전래동화' 이야기의 영화버전인 셈이고, 어린이들에게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같은 한국형 판타지인 셈이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상승효과를 내면서 <신과 함께>는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2,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2. <신과 함께>의 세계관 <신과 함께>에 담긴 세계관은 무엇일까? 우선 불교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사람의 사후에 저승으로 가게 되며 이곳에서 49일을 지내며 7번의 재판을 받는다. 죽은 사람이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까지 49일이 주어지며, 이후에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이 기간에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재를 지내주게 된다. 7번의 재판은 거짓, 나태, 불의, 배신, 폭력, 살인, 천륜 등 7가지 항목이며, 모든 재판을 통과한 자만이 환생할 수 있다. 여기에 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이 혼자 심판의 시기를 걷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에 나온 삼차사가 등장해 이 시기를 함께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신과 함께>는 불교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사후세계관을 보여준다.ⓒ위클리굿뉴스 사실 이러한 사후 세계관과 죄에 대한 인식은 서구에도 등장한다. 고대에는 죽음이 끝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과 죽음 너머 영혼이 사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서구교회 역시 4세기 경 사막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7가지 대죄(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를 6세기 경 교회로 가져와 천년 이상 피해야 할 큰 죄로 여겨왔다. 13세기 단테의 신곡에는 여행자 단테가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 연옥, 천국으로 여행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처럼 사후 세계관에 대한 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양과 서양 모두에 있었고, 죄에 대한 인식 역시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3. 기독교의 생명력 '부활' 이야기해야 그렇다면 한국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또한 이 영화를 보고 감동과 공감을 표시한 많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접촉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 핵심은 '부활'에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막 12:27)이시다. 성경에 나온 심판과 상(賞)주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고 누리고 나누며 사는 삶을 살도록 요청하기 위해 주어진 경고이자 소망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끝을 의미한다. 죽음은 절망일 수밖에 없고,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며 사람들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심판에 대한 자각과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지점에서 종교적 차이를 들어 금하거나 다름을 거론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소극적인 대응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의 철학과 유한한 종교가 다다르지 못하는 지점에서 기독교의 생명력을 이야기해야 한다. 구원의 지평까지 나아가야 한다. '후회'를 넘어 삶의 방향이 바뀌는 '회개'가 중요하며, 스스로의 깨달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를 깨뜨리사 긍휼과 은혜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히 4:14-15) 기독교에 소망이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구원은 피안(彼岸)으로의 도피나 훗날 주어질 보상 정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미 시작된 역사적 사건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질서 놓쳐선 안 돼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이 끊임없이 사후세계를 탐구하고 형상화하는 까닭은 이 땅에서의 부조리함과 고난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웹툰부터 영화까지 제작된 <신과 함께>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적인 성공의 기저에 흐르는 사람들 그리고 시대의 갈망을 기독교 신앙은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복음이 왜 이 시대에도 여전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지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문화와 철학, 종교가 가리키는 진리의 이정표 너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 창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주님의 영광은 만인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만인에게서 흘러 나온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울이 아니라 빛이지요." C.S.Lewis 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온 대화 중 일부다. 우리에겐 오늘도 영원의 빛을 구하는 사람을 향한 공감적 시선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에겐 그 빛을 삶과 문화를 통해 창조적으로 증언할 소명이 있다. 다시 <천국과 지옥의 이혼> 중 일부를 나누며 글을 맺고자 한다. "자네는 자유라는 선물 덕분에 창조자와 가장 닮은 존재가 되었고, 영원한 실재의 일부가 되었지... 자네는 영원한 실재의 정의(定義)를 결코 파악할 수 없어... 우리는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네."

천보라·조준만 기자 2018-10-29

지난 2017년 10월 31일 창간한 <위클리굿뉴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자연을 보전하고 아끼자는 취지로 '창간기획-생명존중 환경사랑 캠페인'을 시작했다. 지난해 11월(본지 3호) 낙태를 시작으로 자살, 안전사고, 미세먼지, 우울증, 지구 온난화 등 지금까지, 총 32회에 걸쳐 진행된 캠페인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주제를 공론화시키는데 앞장섰다. 창간 특집호를 맞아 환경, 생명, 사회적 이슈 중 여섯 가지 주제를 꼽아 지난 1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생명·환경 다양한 이슈 따뜻한 시선으로 다뤄… 한국사회·교회 나가야 할 방향 끌어내 # 나는 19살, 사랑이 엄마입니다(제4호-낙태 편) 지난해 11월 안산시 위드맘 한부모가정 지원센터(대표 이효천 선교사)에서 만난 은지 양은 19살 미혼모였다. 은지 양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놨다. 낙태 논란에는 생각이 많은 듯 입술을 지그시 다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인터뷰 말미 과거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물론 포기할 건 많죠. 주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다른 대우를 받을 거예요. 그런데요. 살만해요. 힘들지만은 않아요. 그리고 행복해요." 그로부터 11개월 후, 대학 새내기가 된 은지 양은 현재 4살 된 딸 사랑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전해왔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여전히 뜨겁다. 헌법재판소는 6년 만에 낙태죄 위헌 여부를 두고 공개변론을 열었고, 선고를 6기 재판부로 넘겼다. 유남석 신임 헌법재판소장은 현안을 연내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해묵은 논란은 첨예한 대립 속에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 生死의 갈림길, 호스피스병동의 하루(제15호-웰 다잉 편) 지난 2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그러나 당시 일각에서 연명의료결정법을 이른바 '웰 다잉법'이라는 왜곡된 의미로 부르면서 사회적 논란이 불거졌다. 인생을 아름답고 평안하게 마무리한다는 의미의 '웰 다잉'. 죽음을 유독 터부시하는 한국사회에선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말이기도 했다. 이에 본지는 지난 2월 진정한 '웰 다잉'을 찾기 위해 고신대 호스피스병동을 어렵게 섭외해 단독취재에 나섰다. 호스피스병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간 갖고 있던 부정적인 선입견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중엔 환자 김선희 씨(가명)도 있었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하루를 소중히 보내고 있다"는 김 씨. 그는 천천히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취재가 끝나고 3주 후, 김 씨의 부음을 들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현재, 남편 이철우 씨는 "호스피스에서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며 "아내의 당부대로 두 아들과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며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다"고 전했다. # 난민, 평화를 찾는 순례자들(제19호-난민 편) 2018년 3월, 시리아 내전의 격화와 미얀마 로힝야족 인종청소로 인해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렇듯 수많은 난민이 고향을 잃고 떠돌아도 난민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주변인이었다. 그러다 올해 6월, 제주도에 549명의 예멘 출신 난민들이 입국하면서 '난민' 이슈는 국내뉴스가 됐다. 하지만 난민을 보는 상당수 한국인의 눈길은 곱지 않다. 난민을 받지 말자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 우려의 시선을 넘어선 혐오가 가짜뉴스를 타고 퍼지고 있다. 불과 70여 년 전 나라를 잃은 이 땅의 사람들도 전쟁과 박해를 피해, 중국과 미국, 러시아를 떠돌았던 난민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정치적 난민이 수립한 망명 정부였다. 기억하자, 우리도 한때 난민이었음을. # 출산절벽 현실로…인구감소 2023년부터(제29호-저출산 편) 아기 울음소리 그친 대한민국. 한국 사회와 정부가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출산장려정책을 편 지 10년. 이 기간 집행된 출산 관련 예산은 80조 원이나 된다. 하지만 출산율은 나아지기는커녕 통계마다 사상 최저와 최악을 경신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지금까지의 '출산율 목표'정책에서 벗어나 '아이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삶의 질 개선'으로 정책의 방향을 수정했다. 출산절벽이 젊은 세대의 장시간 노동, 주거 불안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에서다. 정부는 신혼부부와 청년층의 주거 지원을 확대하고 아빠들의 육아 참여를 높이기 위해 '배우자 출산 휴가' 기간을 늘리는 새로운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여성들의 경력단절 문제, 출산 휴가를 마음껏 이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다면 대한민국 저출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 세상의 모든 'Useless'를 'Useful'로 바꾸다(제30호-환경의 날 편) 올해 봄 '라돈 침대 사태'가 확산하면서 한국 기업의 경영 윤리 및 사회적 책임 결여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 가운데 '제품, 그 내면의 사람이 중심이다'라는 이념으로 성장해가는 사회적 기업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해 약 400만 톤의 버려지는 폐차 가죽시트를 재활용해 가방을 만드는 '모어댄(최이현 대표)'은 BTS 리더 RM과 SK 최태원 회장,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이 주목하면서 착한 소비의 열풍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새터민과 경력단절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채용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인터뷰 후 4개월이 지났다. 모어댄은 이달 '컨티뉴 합정 스토어'를 오픈하며 '같이' 가는 '가치'를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반면 라돈 침대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라돈침대 피해자 집단소송 청구액은 52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다 할 책임과 배상은커녕 추석 연휴 전까지 약속된 침대의 전량 수거조차 지켜지지 못했다. # 플라스틱 시대 "이제는 끝내야 할 때"(제34호-플라스틱 편) 그리스어 'Platikos'에서 따온 '플라스틱'은 가볍고 질긴 비닐봉투에서 단단한 자동차의 내장재, 빨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든 변신했다. 인간은 플라스틱에 열광했고 그 편리함에 푹 빠졌다. 지난 100년은 '플라스틱의 시대'였다. 하지만, 신의 선물처럼 등장한 플라스틱은 점차 지구 환경과 인간의 건강에 재앙이 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은 먹는 샘물과 소금에 녹아들었고, 커다란 플라스틱은 대양을 뒤덮었다. 이에 플라스틱 퇴출을 위한 움직임이 국내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2030년까지 현재 34%인 플라스틱 재활용률을 70%까지 올리고 10월부터 과대포장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위클리굿뉴스 10월 28일, 45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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