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환 기자2020-03-08

합동,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호 지정 단일교회 최다 순교자…대부분 수장당해 천국소망으로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 보여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의 설도항, 잔잔하게 물결치는 서해안에 맞닿은 곳. 부두에는 한적한 배 몇 척이 놓여 있고 그곳을 바라보는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70년 전 한국전쟁당시 전남 영광군에서는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북한군을 비롯한 공산 세력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기념탑 뒷길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낮은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한 염산교회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당시 이 길을 따라 설도항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단일 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기독교 最多 순교자 발생 교회 전남 영광 염산면은 남로당 김삼룡의 주 활동 무대였고 전쟁 전부터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공산당의 유격대가 들어와 후방 교란작전을 펼치면서 염산면 내 이념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는 77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숫자다. 10월 3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순교했다. 피난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지켰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새끼줄로 엮은 돌을 매단 채 교회 앞 바닷가로 끌려가 수장 당했다. 돌이나 몽둥이질에 목숨을 잃었고 죽창에 찔려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염산교회 순교의 현장은 잔혹했지만 성도들은 돌아갈 천국을 가슴에 품고 담대히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한국전쟁 당시 염산군에 주둔한 공산군과 추종 세력에 의해 77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대다수의 성도는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단 채 수장당했다.ⓒ데일리굿뉴스 목 베여 순교당한 어린 자매들 당시 담임이던 김방호 목사를 비롯해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임 후 석달 만에 전쟁을 맞닥뜨린 김 목사는 미군 스파이로 몰리며 지역 공산 세력에게 끌려갔다. 8명의 식구와 함께 몽둥이질을 당하며 순교했다. 공산당 세력에게 교회와 집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교회와 성도를 지키겠단 일념 하나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반 성도와 28명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의 순교도 이어졌다. 노병재 집사와 그의 3형제 가족 22명은하루아침에 수장당했다. 노 집사는 바다에 빠져서도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찬양하며생을 마쳤다. 故 박귀덕 권사의 네 딸은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란이유로 모두 수장 당했다. 첫째 옥자(15)는 막내 미자(3)를 업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울지 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며 위로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에 약이 오른 좌익 세력의 한 남자가 옥자와 미자의 목을 베어 바다로 던졌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다. 김조남(11) 어린이는 집에 들이닥친 공산당 무리에게‘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디 있냐’며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김 군은 “나는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리고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김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한 천국소망 과반의 성도가 목숨을 잃고 예배당이 전소되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신앙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 이어지고 있었다.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인 김익 전도사는 가족이 순교할 당시 처가에 있다가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김전도사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아픔에도 1951년 4월 염산교회에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김 전도사는 첫 예배에서 ‘온가족이 죽임을 당한 곳이기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이곳에 내 부모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가해자 들을 예수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 참된 원수 갚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2년 동안 순교자들과 공산 세력을 추종했던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헌신했다. 김 전도사는 결국 시력을 잃었고 여러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민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좌우 이념의 갈등과 예수를 믿는단 이유 하나로 죽어야 했다. 김 전도사는‘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해가며 복음을 염산 지역에 심었다. 염산교회 임준석 담임목사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반복되면 안 된다”며 “우리가 순교자들이 가졌던 순교자의 천국 신앙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차진환 기자2020-02-27

영광, 전쟁 전중후 좌우 이념 대립 극심 전쟁 2달內 전교인 생매장·수장당해 순교자들의 피…지역 복음화로 꽃피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전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신앙을 키워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 소재한 야월교회는 한국전쟁이 있던 해 전교인 순교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게 된다. 세계 어느 곳을 찾아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교인이 희생당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죽음 앞 순교자의 믿음은 소금처럼 반짝였다 7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반짝이는 염전이 펼쳐진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은 ‘소금밭 천지’라고 불린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70년 전한국전쟁 당시 염산면 지역 교인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유진벨 선교사와 염산면 야월리 지역 교인들로 인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갖은 핍박 속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을 잘 지켜나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피바람이 영광을 덮쳤다. 북한 공산군의 일개 부대가후방 교란작전을 펼쳤고남로당 김삼룡의 부대는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영광군 지역은 이념 갈등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군인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1950년 9월 말부터 11월초까지 약 두 달 동안 교인 모두가 순교하게 된다. 5명은 목에 돌을 멘 채로 수장을 당하고 나머지 60명은 생매장당했다. 1km 정도 떨어진 ‘큰북재’란 곳으로 끌려가 자신이 묻히게 될 땅을 파야만 했다. 끌려간 가족들은 굴비 엮듯이 엮여 생매장을 당했다. 살아 나오려는 사람들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당시 9살 어린아이던 최종한 장로(80)는 끔찍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 장로는 “그때 우리 가정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교 사상이 투철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이 인민군에 끌려가 인민재판 후 죽지 않고 살았다”며 “6.25 전쟁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끔직하다”고 회상했다. 예수 믿어 망한 동네…다시 신앙의 꽃 피우다 순교 이후 야월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된다. 전 교인이 목숨을 잃게 되자 마을에는 ‘예수를 믿고 망한 동네’란 인식이퍼졌다. 교회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살아남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순교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도 어려웠다. 담당 교역자가 부재중인 가운데 인근 염산교회 청년들이 건너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수 믿다가 온 가족을 다죽일 셈이냐는 어른들의 구박에 아이들은 교회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1988년 배길양 목사가 부임하고 나서야 38년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쫓게 됐다.배 목사는 순교자들의 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순교자들이 40년이 다 돼가도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채 서류상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교회가 전소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다 보니까 누구 한 사람 사망신고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야월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현재 야월도에는 280여 세대가 있는데 그 중 100여 세대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약 35%의 지역 복음화가 이뤄졌다. 순교한 야월교회 모든 성도들은 염산의 명물 소금처럼 이 지역에 녹아 들어 복음의 터를 닦았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는 ‘맞잡은 손’이란 조형물이 있다. 순교의 아픈 상처를 담은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야월교회 심재태 담임목사는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순교신앙을 되새겨야 할 때”라며 “그때 당시순교자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진환 기자2020-06-05

생산에 5초, 사용하는 데 5분. 하지만 분해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00년. 플라스틱 폐기물이 그렇다.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히 플라스틱 일회용품 등을 줄여야 하지만 편리함을 내려놓기 쉽지 않다. ㈜동일프라텍 김지현 대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불과 180일 밖에 걸리지 않는 생분해 빨대 ‘디앙’을 만들고 사람과 지구 모두가 건강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2000년대 이후 테이크아웃 사업이 성장하면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이 증가했다. 김 대표는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환경오염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친환경 소재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친환경 빨대 ‘디앙’이다. 옥수수에서 추출한 PLA라는 물질을 사용해 빨대를 만든다. PLA수지는 일반 플라스틱과 유사하지만 각종 환경호르몬, 중금속 등 유해물질이 검출되지 않아 안전하다. 사용된 빨대는 180일 만에 미생물에 의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자연분해 되어 퇴비로도 사용할 수 있다. 제조사 최초로 환경부가 오염물질이나 온실가스 배출량, 자원·에너지 소비 정도를 평가해 자연친화적인 제품에 부여하는 환경표지인증을 받았다. 제조공정 가운데 발생한 자투리도 모두 노끈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김 대표는 모든 생산 과정에서 남는 자원을 만들지 않고 무엇이든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끊임 없이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제조업은 제품 전 과정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며 “환경을 생각하는 우리의 의지를 담아 직접 브랜드를 만들어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디앙은 환경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전혀 해롭지 않다. 식품용 원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호르몬이 없다. 김 대표는 “음료보다 입에 먼저 닿기에 더욱 깨끗하고 안전해야 한다”며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내 아이에게 바로 물릴 수 있도록 꼼꼼히 살핀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디앙 요구르트 빨대.(주)동일프라텍 김지현 대표는공장에서 나온 빨대를어린 두 자녀 입에 물려도 괜찮을 만큼 깨끗하고 안전하게 제작한다. 실시간 CCTV를 통해 제조과정을 공개할 만큼 자신있다는 게 김대표의 입장이다.ⓒ데일리굿뉴스 빨대를 씻어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그는 빨대를 식품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세계식품인증 가운데 최상위 인증에 해당하는FSSC22000(ISO22000+HACCP)을 받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위생용품 시험 검사를 합격하고 피부자극 테스트까지 완료했다. 플라스틱 제품에 대한 김 대표의 신념은 뚜렷하다.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안 쓰는 것이 맞지만 필요하다면 취하여 쓰되 남용해선 안 된다는 것. 우리에게 허락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자원의 선순환을 극대화 시켜야 한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다른 다라에 비해 재활용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비율이 적다”며 “버릴 때 물로 한 번 씻어서 이물질을 제거하고, 모형·색상별로만 잘 분류해도 자원 활용도가 상당히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어 “친환경제품을 사용하라는 규제가 부재인 상황에서 값싼 플라스틱에 손이 가는 건 당연한 사실”이라며 “소비자뿐만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 제품 생산자 모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차진환 기자2020-04-17

최근 전남 광주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단 신천지로 인해 15가정이 집단 이혼소송에 휘말렸다. 이들 가운데 10가정은 이혼소송 중이며 몇몇은 결혼 생활을 끝냈다. 이러한 가정 파탄은 신천지 내에서 빈번했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다. 심지어 배후에 신천지의 지시가 있었다는 탈퇴자들의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신천지에 빠진 배우자때문에 가정불화는 물론 이혼 위기까지 겪었던 피해자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우의 수 따져 상황별 매뉴얼·지침 지시 배우자 험담으로 가족 내 신뢰 무너뜨려 신천지 탈퇴자들이 이단사역에 힘 보태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던 박찬주(가명) 씨는 7년 전 처제로부터 아내가 신천지에 다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통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 씨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다시는 신천지에 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하지만 6개월 뒤 교회 목사님을 통해 아내가 여전히 신천지 생활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씨는 “두 번째로 발각된 이후, 분노가 치밀었고, 아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몸싸움도 일어났다”며 “그 때 신천지 측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아내를 데려갔다”고 회상했다. 보름 뒤 그녀는 “신천지 활동을 간섭하면 이혼하겠다”, “이를 어길 시 이혼하고 양육·재산권을 가져가겠다”는 등 7~8가지 항목의 각서를 박 씨에게 건넸다. 각서를 써야만 집에 들어오겠다는 아내를 두고 박 씨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들 부부의 자녀는 1살과 3살로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 때였다. 또 다른 피해자 정필호·김아정(가명) 부부는 아내 김 씨가 신천지에 5년 간 몸을 담으면서 갈등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교회에 나간다고만 했다. 신앙이 없던 정 씨는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하던 일까지 그만둔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랐다. 정 씨는 교회에 간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흰색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은 신천지 무리에서 나오는 아내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사이비나 이단이라고 하면 사람을 감금하거나 인성의 문제가 생기는 집단이란 부정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신천지에서 빼오기 위해 처가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추궁을 들었다. 정 씨는 “신천지는 남편이 아내가 신천지란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상황들을 수 없이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대응을 준비해 뒀다”며 “남편에 대한 험담으로 신뢰를 무너뜨려 친정 식구들과 남편의 사이를 벌려놔야 한다는 것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아내 김 씨는 이미 신천지로부터 지속적인 정신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가족이 알게 되면 신변보호요청서를 다시 작성하게 해 추후 다툼이 생길 경우 신천지 섭외부에 연락하도록 했다. 그러면 섭외부에서 경찰에 신고해 신도들의 신변을 확보하겠단 의도로 풀이된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한 매뉴얼과 상황에 맞는 신천지 지도부의 지시가 존재한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 씨는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무조건 크게 소리 지른다. 도망간다. 신천지 측 전화번호를 2개 이상 외운다 등 언제든지 이단상담에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신도들은 계속 정신교육을 시켜 놓는다”고 강조했다. 신천지의 교리상 “내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다. 내 생각이 가장 비진리다”는 식으로 신천지 교육생 시절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가족과 세상은 신도들의 적이며 특히 이단 상담소는 가장 큰 대적자라고 해서 상담조차 받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힘들어 하는 가족의 모습을 거짓이라 종용하며 신천지 매뉴얼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김 씨는 “신천지는 지시를 받아 따르는 체계다 보니, 가족과의 갈등은 위로 보고하게 돼있다”며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다고 보고했더니 신천지에서는 ‘다 연기다. 그런 부분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피드백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에 정 씨는 “아내를 두고 신천지와 싸우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내는 자기의 의사가 없었고 자아도 없는 듯 했다”며 “분노도 느꼈지만 아내를 빼내오기 위해서 감정보단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신천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들 부부 모두 이단상담소의 도움으로 가정을 회복했다.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신천지에 빠져 있는 가족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후 전략을 세웠기에 가능했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경험자들과의 만남도 도움이 됐다. 박 씨는 “이단상담소에 데려갈까 봐 차에 타는 것도 거부하는 아내를 안심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며 “상담소 소장과 상담사를 통해 아내가 신천지에서 탈퇴할 수 있었다”고 조언했다. 광주이단상담소 임웅기 소장은 “본인들이 해결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져서 전문가의 손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며 “전문가의 도움을 먼저 요청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진환 기자2020-03-08

합동,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호 지정 단일교회 최다 순교자…대부분 수장당해 천국소망으로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 보여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의 설도항, 잔잔하게 물결치는 서해안에 맞닿은 곳. 부두에는 한적한 배 몇 척이 놓여 있고 그곳을 바라보는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70년 전 한국전쟁당시 전남 영광군에서는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북한군을 비롯한 공산 세력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기념탑 뒷길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낮은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한 염산교회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당시 이 길을 따라 설도항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단일 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기독교 最多 순교자 발생 교회 전남 영광 염산면은 남로당 김삼룡의 주 활동 무대였고 전쟁 전부터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공산당의 유격대가 들어와 후방 교란작전을 펼치면서 염산면 내 이념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는 77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숫자다. 10월 3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순교했다. 피난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지켰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새끼줄로 엮은 돌을 매단 채 교회 앞 바닷가로 끌려가 수장 당했다. 돌이나 몽둥이질에 목숨을 잃었고 죽창에 찔려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염산교회 순교의 현장은 잔혹했지만 성도들은 돌아갈 천국을 가슴에 품고 담대히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한국전쟁 당시 염산군에 주둔한 공산군과 추종 세력에 의해 77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대다수의 성도는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단 채 수장당했다.ⓒ데일리굿뉴스 목 베여 순교당한 어린 자매들 당시 담임이던 김방호 목사를 비롯해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임 후 석달 만에 전쟁을 맞닥뜨린 김 목사는 미군 스파이로 몰리며 지역 공산 세력에게 끌려갔다. 8명의 식구와 함께 몽둥이질을 당하며 순교했다. 공산당 세력에게 교회와 집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교회와 성도를 지키겠단 일념 하나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반 성도와 28명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의 순교도 이어졌다. 노병재 집사와 그의 3형제 가족 22명은하루아침에 수장당했다. 노 집사는 바다에 빠져서도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찬양하며생을 마쳤다. 故 박귀덕 권사의 네 딸은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란이유로 모두 수장 당했다. 첫째 옥자(15)는 막내 미자(3)를 업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울지 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며 위로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에 약이 오른 좌익 세력의 한 남자가 옥자와 미자의 목을 베어 바다로 던졌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다. 김조남(11) 어린이는 집에 들이닥친 공산당 무리에게‘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디 있냐’며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김 군은 “나는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리고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김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한 천국소망 과반의 성도가 목숨을 잃고 예배당이 전소되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신앙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 이어지고 있었다.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인 김익 전도사는 가족이 순교할 당시 처가에 있다가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김전도사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아픔에도 1951년 4월 염산교회에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김 전도사는 첫 예배에서 ‘온가족이 죽임을 당한 곳이기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이곳에 내 부모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가해자 들을 예수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 참된 원수 갚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2년 동안 순교자들과 공산 세력을 추종했던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헌신했다. 김 전도사는 결국 시력을 잃었고 여러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민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좌우 이념의 갈등과 예수를 믿는단 이유 하나로 죽어야 했다. 김 전도사는‘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해가며 복음을 염산 지역에 심었다. 염산교회 임준석 담임목사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반복되면 안 된다”며 “우리가 순교자들이 가졌던 순교자의 천국 신앙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보라 기자2019-12-22

'갈등'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특히 올해는 내부에서 곪던 갈등이 한꺼번에 터지며 증폭됐다. 서울 도심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각종 집회로 몸살을 앓았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좌우로 나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연간 최대 246조 원. 6년이 지난 지금, 사회갈등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해는 짐작조차 어렵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등의 골을 짚어봤다. '갈등', 한국사회 둘로 갈라지다 "올해는 이념 갈등이 유독 피부로 와 닿던 한해였습니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좌, 우 양극단으로 나눠 공격하고 분열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_직장인 김 모 씨(남, 50) 지난 9월 서울 도심이 태극기와 촛불로 갈라졌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두고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간 맞불집회가 열린 것. '광화문 태극기집회'와 '서초동 촛불집회'로 불리며 광장의 정치로 양분된 두 집회는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고조시키며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은 특히 올해 격해지는 양상을 띠었다. 갈등에서 촉발된 대규모 집회와 행진으로 전국 도심 곳곳이 몸살을 앓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잣대가 한국사회 내 팽배해졌다. 갈등 요소도 과거 남북이나 지역 갈등에서 지금은 이념, 빈부, 세대, 성별 등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9일 발표한 '2019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 주요 집단별 갈등 중 ‘진보와 보수’를 꼽은 응답자는 91.8%로 2016년 조사보다 14.5%p 상승했다. 이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85.3% △대기업과 중소기업 81.1% △부유층과 서민층 78.9% △기업가와 근로자 77.7% 등의 순으로, 모두 70%를 넘겼다. 최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면서 다시금 논란이 불거졌던 '남성과 여성' 간 갈등은 3년 전 조사 때보다 11.8%p 상승한 54.9%로 집계됐다. 올해 처음 조사한 한국인과 외국인 간 갈등도 49.7%로 집계됐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에 대해서는 '심각하다'는 응답이 90.6%에 달해, 국민이 느끼는 갈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방증했다. '불공정·불평등'이 낳은 병폐 "이번 정부가 공정과 평등을 외쳤지만, 특히 조국 전 장관 문제나 최저시급 인상, 젠더 등 어떤 문제에 대한 조치에서 오히려 또 다른 불공정을 낳는 모습을 보았어요. 유독 불공정과 불평등을 체감하고 깊이 생각했던 올 한해였죠."_ 직장인 최 모 씨(여, 31) 전문가들은 갈등을 고조시킨 원인을 '공정'에서 찾았다.2016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각종 의혹, 이른바 '조국 사태'가 불거진 것. 공수 교대에도 특권층의 비리와 불공정 논란은 되풀이됐고, 현 정부의 핵심 가치인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크게 훼손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은 분노했고 사회적 갈등은 커져만 갔다. 참지 못한 국민은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웹에서 울분을 터뜨렸다. '외상 후 울분 장애(PTED)라는 개념을 확립한 정신의학자 독일 샤리테대학 미하엘 린덴 교수는 "울분은 일상에서 겪은 부정적인 감정이 정의나 공정하지 못한 특정 사건을 계기로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를 넘기는 등 당시 기록적인 판매부수는 외신마저 주목할 정도였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책의 인기 요인과 관련해 "한국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욕구와 갈증"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지 10년. 한국사회는 '상실의 시대'로 퇴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공정은 한국사회가 앓는 만성적인 고질병이라며 '중환자 상태'라고 진단했다. 신광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공정은 올해의 문제가 아닌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며 "올해는 그동안 고착됐던 불공정 문제가 조국 교수 법무부 장관 임명 관련 등이 정치 쟁점화되면서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법이나 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또 엄격한 집행 요구가 되는 시작단계부터 단추가 안 끼워지는데 제도만 바꾼다고 공정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 구조적·제도적 측면과 연결돼 있어 오랜 기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준만 기자2019-01-27

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박경진 장로(꽃재교회)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태어났다. 외눈박이, 애꾸,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란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됐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배경이 됐다. 힘든 시절을 딛고 진흥문화를 설립해 업계 1위의 캘린더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 장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공'을 사회에 나누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해외입양인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박 장로는 해외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입양인초청모국방문' 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통해 해외 입양인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건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건강한 자부심을 얻고 돌아간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2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 장로는 "해외입양인들이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 장로는 지난 2010년 '진흥장학회'를 설립해 재능과 열정을 갖췄지만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돕고 있다. 지난해까지 4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진흥장학회의 시작은 박 장로가 회갑 축하연 대신 그 비용을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내인 한춘자 권사의 칠순 때 개인 소유의 빌딩과 임대 수입금, 자서전의 판매 수익금을 출연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장학회 설립에 대해 그는 "지난날 성장 과정에서 체험한 뼈저린 가난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겠다는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됐다"며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장학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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